오늘 충무공 탄신 461돌…현충사 대대적 탈바꿈

  • 입력 2006년 4월 28일 03시 01분


28일은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 탄신 461돌이다. 이날 전국적으로 충무공의 애국 혼을 기리는 행사가 벌어진다.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현충사(顯忠祠·충남 아산시)가 문화교육 공간 겸 종합 충무공기념관으로 탈바꿈한다.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지시로 1966∼1974년 성역화 사업을 한 지 32년 만이다.

현충사관리사무소는 충무공 탄신을 앞두고 올해부터 2012년까지 157억여 원을 들여 시설을 개축하거나 유물을 확충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에 따라 160평인 유물전시관은 400평으로 넓어지며 이름도 충무공기념관으로 바뀌어 2011년 개관한다. 기념관에는 충무공과 관련한 유물을 총망라해 전시한다는 계획이다.

기념관의 위치도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인 충무문 밖으로 옮겨진다. 관람객이 충무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경내로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충무공 고택 주변에는 토담을 만들어 옛 마을의 흔적을 살리고 고택의 내부도 고증을 거쳐 복원하기로 했다. 또 이순신 장군이 사용했던 충무정(우물)을 복원하고 활터에 체험시설을 마련하며 편의시설도 확충한다.

유물전시관과 가까운 옛 본전(本殿) 근처에는 야외전시관을 만들어 현충사와 관련된 근대 유물과 옛 본전 중건과 관련된 신문기사 및 공사 기록을 전시한다. 옛 본전의 중건을 이끈 동아일보 기사가 비중 있게 전시될 전망이다.

옛 본전은 일제강점기에 건립돼 일제에 항거한 한민족의 응집력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현충사 성금답지” 1932년 本報보도
현충사 중건을 앞두고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다는 내용의 동아일보 기사(1932년 6월 7일자). 가운데 영정은 당시 동아일보 화백인 청전 이상범 선생이 그려 보도 이틀 전 봉안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13일 아산군 음봉면 사정리의 충무공 묘소 위토(묘에서 지내는 제사비용 마련을 위해 경작하는 논밭)가 당시 덕수 이씨 13대 종손의 부채 때문에 경매 위기에 처했다고 처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다음 달 ‘민족적 수치-채무에 시달린 충무공 묘소’라는 사설을 통해 충무공 유적의 보존을 촉구했다. 또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의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1931년 6월∼1932년 4월·178회).

본보의 보도와 연재소설의 영향으로 2만여 명(400여 개 단체 포함)이 성금 1만6000원을 보냈다.

1931년 5월 23일 발족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이 성금 등으로 종손의 채무를 갚은 뒤 위토를 2배로 넓혔다. 다음해 6월 5일에는 현충사 사당(옛 본전)을 중건했고 묘소와 비각을 정비했다. 동아일보 만평가인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의 충무공 영정 봉안식도 이날 열렸다.

1932년 6월 3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뜨거웠던 국민 성원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민족적 지정(至情)의 발견에 있어서는 상하를 묻지 아니하며 해내외(海內外)와 경향의 구별이 없었으며, 빈부의 이(異)가 없었다. 혹은 끼니를 굶어 (성금을) 보내기도 하며, 혹은 의복을 팔고, 혹은 품을 팔아 보내는 이도 있으며….”

김사원(金士源) 현충사관리사무소장은 “현재 현충사는 시설이 낡고 유물을 확보하지 못해 다른 지역에 있는 40여 곳의 충무공기념관과 큰 차이가 없다”며 “종합정비계획을 충실히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아산=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中다녀온 사신 임금께 허위보고… 밥 토할 지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82년 지인에게 초서로 써 보낸 편지.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임금에게 허위 보고하는 것을 개탄하는 내용이다(왼쪽). 충무공이 1587년 쓴 편지는 대동미 납부 독촉에 시달리는 민초의 아픔을 안쓰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 제공 성균관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30, 40대에 초서로 써서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 2편과 한시 1편이 처음으로 번역돼 27일 공개됐다.

“세모에 상환 독촉을 받자 가난한 집들은 대동미(大同米)를 갚아야 하나 대책이 없으니 그 근심과 고뇌가 가히 상상이 갑니다(歲暮債督 雖是貧家大同之患 而彌縫沒策 愁惱可想).”

“(중국에 다녀온) 사신이 임금께 돌아와 보고하되, 역사에 이름을 올리기만을 한없이 욕심내고 있으니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웃음이 나서 밥을 토하게 할 일입니다(使行間已復命 而掛名淸史 爲之健羨 眞令人 噴飯·‘淸’자는 ‘靑’의 오기).”

난중일기 원본을 번역 출간했던 노승석(성균관대 박사과정 수료) 씨가 문화재 수집가 남궁련 씨가 소장하고 있는 편지 중 일부를 번역한 것이다.

주민들의 어려운 형편을 안쓰러워하는 편지는 충무공이 함경도 녹둔도에서 근무하던 1587년(42세)에 쓴 것이고, 1582년에 쓴 또 다른 편지는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이 임금에게 허위로 보고하는 풍토를 꼬집고 있다.

한시는 영주(현 강릉)목사에게 보낸 것으로 임진왜란이 끝나면 관동 지방의 절경을 보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 BGM : MBC 사극 ‘불멸의 이순신’ 오프닝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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