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서다. 조각배 하나 타고 망망대해에서 거대한 돛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평생을 거쳐 터득한 그 스타일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추고, 무심함 속에 고고함을 머금고 있다.
이 책에서 바다는 파도가 거세기로 소문난 500년의 서양 근현대사다. 돛새치는 역사 주제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문화사다. 그리고 노인은 올해로 99세가 된 자크 바전 미국 컬럼비아대 명예교수다.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이 역사서의 주인공은 바로 그다.
1907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920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 예술사를 전공한 바전 교수는 프랑스 68혁명이 발생하기 1년 전에 이미 명예교수가 된 ‘살아 있는 역사’다.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썼다고 자부하는 이 책에는 서양문화사를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녹여 내는 대가의 솜씨가 담겨 있다.
그는 우선 500년의 역사를 종교혁명기, 군주혁명기, 자유주의혁명기, 사회주의혁명기라는 4시기로 토막을 나눈다. 그 다음 그는 서양사에 익숙한 통념에 끼어 있는 기름기들을 쳐낸다.
“이념을 표방하며 권력과 재산의 살벌한 교체를 이루는 게 혁명이 아니면 뭐가 혁명이란 말인가”라며 종교개혁을 종교혁명으로 바꿔 부르는 것과 같은 자신감은 이 책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는 편협한 도덕원리주의로만 알려진 청교도주의가 개인의 양심에 입각한 관용과 쾌락으로서 예술을 긍정했으며, 감정에 지고의 지위를 부여했다고 오해되는 낭만주의가 지성과 감성의 통합을 추진했음을 보여 준다.
바전 교수는 근현대사에는 르네상스처럼 문명에 대한 동경과 종교혁명처럼 원시 상태를 지향하는 2개의 흐름이 관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4개의 혁명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해방, 개인주의, 원시주의, 추상, 분석, 세속주의, 과학만능주의를 제시한다. 저자에게 20세기의 실존주의,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양을 끌고 온 이런 동력들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보여 주는 착란 증세에 불과하다.
이 책의 미덕은 역사를 특정 인과관계로 설명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그 입체적 모습을 재구성해 주는 데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이 ‘살아 있는 역사’가 한 세기 동안 축적한 방대한 독서량이다. 과연 이 책 도처에 인용되는 1차 원전들 앞에서 당당할 이가 얼마나 될까. 원제 ‘From Dawn to Decadence’(2000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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