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29일 오전 7시경 중국 상하이(上海).
스물다섯 살(만으로는 24세)의 청년, 윤봉길(尹奉吉)은 일왕 생일축하식장이자 거사장소인 훙커우(虹口) 공원으로 떠나기 직전 백범 김구(金九) 선생과 시계를 바꿔 찬다.
후일 백범은 “나는 기념품으로 그 시계를 받았다”고 ‘백범일지’에 적었으나 그것은 기념품이라기보다 ‘예정된 유품(遺品)’이었다.
윤 의사와 굳은 악수를 나누며 백범은 “후일 지하에서 만나자”는 말로 애끓는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오전 11시 40분경. 축제 분위기였던 훙커우 공원은 윤 의사가 던진 폭탄이 터지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일본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치명상을 입고 한달이 못 가 죽었다.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오른쪽 눈을 잃었고 중국주재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의 오른쪽 다리도 날아갔다.
의거 직후 상하이 무정부주의 계열의 항일조직인 ‘남화한인청년동맹’에 한 일본인 기자가 뛰어 들어오며 “너희, 성공했다”고 외쳤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이란 책에 실린 독립운동가 정현섭(鄭賢燮) 옹의 회고.
“(남화동맹을 은밀히 도와 온) 그 일본인은 우리가 거사한 것으로 알고 축하하기 위해 공원에서 곧장 달려 왔던 겁니다.”
일제에 고통 받던 중국인들도 오후 2∼3시경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 침략자를 응징한 거사에 통쾌해 했다.
항일운동사에 빛나는 쾌거를 한민족에게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동아일보였다. 의거 당일 오후 호외를 2차례나 발행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린 사람은 25세 조선인 윤봉길’이라고 보도했다. 다른 국내 신문들이 대부분 5월 1일에야 이 소식을 전한 것과 비교하면 이틀이나 빨랐던 것이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李炫熙)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통신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그처럼 신속, 정확하게 보도하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항일 조직과 동아일보 사이에 비밀 연락망이라도 있었던 걸까. 윤봉길 의거 특종 보도의 경위는 한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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