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대체할 민주주의 찾아라…정치학계,민주주의 위기 주목

  • 입력 2006년 5월 2일 02시 59분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행진을 펼치는 필리핀 시위대. 최근 남미와 동남아의 ‘민주주의 초년병’ 국가들 사이에서는 투표 절차를 무시한 채 피플 파워를 동원해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관철하려는 행태가 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요약되는 이런 현상 뒤에서 새로운 양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색이 꿈틀거리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행진을 펼치는 필리핀 시위대. 최근 남미와 동남아의 ‘민주주의 초년병’ 국가들 사이에서는 투표 절차를 무시한 채 피플 파워를 동원해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관철하려는 행태가 늘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로 요약되는 이런 현상 뒤에서 새로운 양태의 민주주의에 대한 모색이 꿈틀거리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프랜시스 후쿠야마 씨는 ‘역사의 종말’(1989년)에서 냉전의 종식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최종 승리를 거뒀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선언 직후 자본주의는 유럽·일본형의 이해 당사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와 영미형의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로 분열됐다. 반면 민주주의는 동유럽 붕괴와 동남아·남미의 민주화 순풍 속에 독야청청해 왔다.》

그러나 최근 각국에서 민주주의가 과잉 또는 결핍됐다는 논의가 불거지면서 민주주의의 위기가 심심치 않게 거론된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태국과 필리핀의 새로운 ‘피플 파워’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우려했다. 총리와 대통령의 교체를 투표라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대중의 직접 항의로 관철시키는 현상을 지적한 것. 동남아의 이런 현상은 남미의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 재발과 맞물려 ‘민주주의 초년병들의 함정’으로 묘사된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위기가 거론되면서 민주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새롭게 모색된다. 민주주의의 분화 또는 진화로 불리는 이런 현상은 정치학계의 주된 관심사다. 7월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열릴 제20차 세계정치학회(IPSA)의 주제가 ‘민주주의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다.

국내에서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요약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층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박효종(정치학) 서울대 교수는 올해 초 출간한 저서 ‘민주주의와 권위’(서울대출판부)에서 ‘민주주의=정의 실현’에서 ‘민주주의=평화 공존’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가 사악(邪惡)을 일소할 것이라는 도덕주의적 이상론에서 벗어나 민주주의가 다원적 세력 간 갈등을 조정하는 게임의 법칙을 제공할 뿐이라는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중독재론’(독재는 대중이 암묵적으로 동조해 가능했다는 것)의 핵심 논객인 임지현(역사학) 한양대 교수는 최근 대중독재 토론회에서 좀 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나치즘과 파시즘은 서구 자유민주주의 안에 이미 배태된 것”이라며 “자유민주주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전체주의”라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민주주의=정치적 해방’이라는 등식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박 교수의 문제의식과 상통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권력의 교묘한 합리화’로 바라보는 점에서 현실 민주주의의 극복을 주장하는 셈이다.

최근 출간된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아르케)는 이런 민주주의의 분화 또는 진화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보여 준다. 현재의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로서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공화주의적 민주주의 등에 대한 최신 연구 성과를 모았기 때문이다.

참여민주주의는 대의제로 선출된 대표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말한다. 토의민주주의라고도 불리는 심의민주주의는 시민사회에서 공개적이고 합리적 토론을 통해 공론을 이룬 뒤 의회에서 이런 공론을 바탕으로 타협을 하여 최종 의사결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양자는 대의제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미했다는 점에서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우파적 전통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공화주의적 전통이다. 공화주의는 공공영역에 대한 참여를 시민의 고결한 의무로 여기는 ‘시민적 덕성’을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다.

문제는 모든 시민이 공공의 문제에 똑같은 정도의 관심과 열정 그리고 충분한 정보를 갖고 토의를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이 평등에 기초하지만 공화주의는 엘리트주의에 기초한다는 차이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를 단수(單數)로 부르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점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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