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에 찢어질 듯 흔들리는 텐트 안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박영석(43) 등반대장이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웬 성자 타령요”라고 하자 박 대장은 “모든 준비는 다 됐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니 지금 무슨 일인들 못하겠어”라고 한다.》
지난달 5일 에베레스트 횡단 원정대 본대가 중국 티베트 장무에서 카라반을 시작해 베이스캠프를 구축한 지 한 달째. 황산 음복(?) 사건 등 뜻하지 않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7명의 원정대원이 개미처럼 작업을 계속해 전진베이스캠프(해발 6400m), 노스콜캠프(캠프3·7100m), 캠프4(7800m)를 차례로 구축했다.
29일 셰르파들의 리더인 세랍 장부(37)씨의 지휘 아래 등반 셰르파들이 해발 8300m에 최종 캠프5를 구축하고 산소통 등 등반 장비들을 올려놓아 일단 준비는 끝.
남은 일은 대원들이 캠프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고소 적응을 더욱 단단히 하고 일기예보를 지켜보면서 정상 공격에 가장 좋은 날을 기다리는 것. 원정대는 이틀에 한 번꼴로 고국의 기상청으로부터 e메일로 에베레스트 해발 7000m, 8000m 그리고 8850m 정상의 바람의 방향과 세기(m/sec)를 전해 받는다.
세계 각국 기상대들은 슈퍼컴퓨터로 분석한 기상정보들을 공유하는데 이 중 에베레스트 관련 정보를 원정대들에게 보내 준다. 위성통신 단말기(사용 요금이 엄청 비싸다!)를 연결해 일기 예보를 받아보는 때는 매일 오전 10시(중국 시간). 노트북 액정화면에 나타나는 숫자에 따라 그날 하루의 원정대 분위기가 결정된다.
원정대가 계획한 1차 정상 공격일은 어린이날인 5일. 원정대가 이날을 공격일로 잡은 데는 이유가 있다. 원정 출발 전 박 대장과 대원인 허영만 화백이 불치병을 앓고 있는 24명의 어린이에게서 소망을 적은 편지를 받아 왔고 이를 이날 정상에 올리기로 약속한 것.
지난달 28일 받아본 5월 5일의 예보를 보고 대원들은 모두 기절할 뻔했다. 초속 29m. 초속 14m 이상의 바람을 블리자드라 하는데 그 2배가 넘는 강풍이 예상됐던 것이다. 박 대장이 대원들에게 “모두 함께 기도하자”고 한 말은 이때 나왔다.
기도가 통했는지 4월 30일 들어온 예보는 대원들을 고무시켰다. 5월 5일 초속 15.6m로 바람이 불다가 잠잠해져서 7일에는 초속 2m대의 솔바람.
대원들의 손길이 바빠졌고 1일 예보도 동일하다면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하지만 1일 받아본 5일의 바람예보는 다시 초속 20m를 넘고 있었다. 기약없는 기다림이 또다시 시작된 것이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돌이켜보려는 의도였을까? “아, 예전에는 바람의 냄새를 참 잘 맡았었는데….”라고 박 대장이 운을 뗐다.
설명인즉 요즘처럼 기상청의 과학적인 데이터를 받지 못하던 1990년대 히말라야를 안방 드나들 듯 할 때에는 아침에 일어나 바람의 냄새를 맡아 보면 기상의 변화를 맞힐 수 있었다는 주장. 과학이 발달한 탓에 본인의 ‘초능력’이 퇴색했다는 푸념도 우스갯 소리로 덧붙여졌다.
커피전문점이나 빵집 앞을 지날 때 향기로운 냄새로 발길을 멈춘 경험밖에 없는 기자로서는 믿기 어려웠지만 박 대장과 여러 차례 히말라야 원정을 함께한 전남대 에베레스트원정대의 이현조(33) 씨는 “정말 귀신처럼 잘 맞혔다”고 맞장구를 쳤다.
등반 일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지는 데는 불의의 사고로 네팔 카트만두까지 후퇴했던 오희준(36) 등반부대장의 ‘컴백’이 큰 몫을 했다. 전진베이스캠프(6400m)에 선발대로 올랐다가 충전배터리용 황산을 입에 대 카트만두로 후송됐던 그는 열흘 만인 지난달 26일 건강한 모습으로 베이스캠프에 재입성했고 다음 날부터 전진베이스캠프와 노스콜 캠프에 차례로 올라가 캠프 구축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오 부대장의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동아닷컴에 개설된 원정대 미니홈피에는 쾌유를 비는 글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세를 치러 대원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황산 사건으로 그는 ‘황산 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뒤 남쪽 네팔 쪽으로 횡단하는 박 대장은 정상에서 티베트 쪽으로 내려가는 다른 팀의 지휘를 오 부대장에게 맡길 예정이다.
에베레스트=전 창 기자 jeon@donga.com
몇 시예요?… 티베트선 베이징-네팔 시간 함께 사용
“지금 몇 시예요?” “어느 시간으로 말이죠?”
에베레스트(해발 8850m) 북쪽 티베트 베이스캠프(해발 5100m)에서 흔히 나누는 대화다.
‘어느 시간’이라니? 사용하는 시간이 여러 가지라는 얘기인가? 그렇다. 중국령 티베트자치구에선 적어도 2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중국 정부의 공식 시간인 ‘베이징 시간’과 살아가는 데 유용한 ‘네팔 시간’을 현지인들은 병행해 쓰고 있다.
그 사연은 이렇다. 서쪽으로 파키스탄, 동쪽으로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광활한 영토의 중국은 베이징 시간 단 하나를 쓰고 있다. 중국의 영토는 경도의 차이를 보면 그리니치표준시 기준으로 여러 시간의 시차가 나는데도 시간은 모두 베이징에 맞춘다. 즉 티베트와 베이징의 시간이 같게 하는데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5월의 티베트에서는 베이징 시간을 따르면 오전 7시에도 해가 뜨지 않는다. 반대로 오후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민들은 관공서에 갈 일을 빼놓고는 경도가 비슷한 네팔 시간을 사용한다. 네팔과 중국의 시차는 2시간 15분. 중국 시간으로 오전 8시는 네팔 시간으로 오전 5시 45분이 된다. 15분의 시차도 황당하다. 시차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통상 시간별로 차이나지만, 네팔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차를 15분 단위로 사용한다.
원래는 표준시보다 5시간 30분 빠른 인도와 같은 시간을 사용하는 게 타당하나 네팔 왕국은 사이가 좋지 않은 인도와 같은 시간대를 사용할 수 없다며 15분을 더해 표준시보다 5시간 45분 빠른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원정대원들의 머리가 복잡해진다. 원정대가 받는 기상 정보들은 표준시로 통일돼 있어 결국 3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에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소식을 생방송으로 보내야 하는 방송 스태프는 한국 시간까지 초단위로 꿰고 있어야 하니 시계 4개를 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에베레스트=전 창 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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