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당대에는 외면받았던 그림이 어찌하여 걸작 반열에 올랐을까.
이유는 피카소가 캔버스로 말하려 했던 인간과 세상을 보는 다중적(입체적) 시선 때문이었다. 입체파는 화면을 통해 ‘삶의 복잡함’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들은 기존 화가들이 종교처럼 신봉했던 원근(遠近)의 시선에서 벗어나 앞, 옆, 뒤, 위 등 다양한 시선을 평면에 구현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기준이 다양하다’는 것을 제시했다.
이런 생각들은 시간과 공간조차도 상대적이라는 현대 과학의 성과와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상상력과 맞아떨어져 입체파의 전위인 피카소를 철학자 반열로 끌어올렸다.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생각을 일상으로 끌어내리면, 우리는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인간관계’를 이해하는 다양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피카소 이전 화가들이 가졌던 원근의 시선에 빗댈 수 있는 ‘선악’의 기준을 버리고 다양하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사람을 평가하면 인간에 대한 헛된 환멸이나 쓸데없는 실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시사하는 영화가 바로 ‘프라이멀 피어’(Primal Fear, 1996년)와 ‘데이비드 게일’(The Life of David Gale, 2003년)이다. ‘프라이멀 피어’의 주인공 직업은 변호사이고 ‘데이비드 게일’의 주인공 직업은 기자다. 각자 진실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직업을 가진 두 사람은 살인사건에 개입된다.
이들은 남들이 모두 살인자라고 하는 사람(프라이멀 피어), 심지어 사형 선고까지 받은 사람(데이비드 게일)을 변호사와 기자로 만나 이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며 고군분투한다.
마침내 ‘프라이멀 피어’의 변호사는 승소하고 ‘데이비 게일’의 여기자는 사형수 이야기를 대서특필해 사형폐지운동에 기여한다.
영화는 두 사람의 이런 영웅담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말미에 극적 반전을 함으로써 두 사람이 사실은 각각 살인자에게 ‘속는다’는 안타까운 결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을 속인 것은 범죄자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영화 속 변호사, 기자 두 사람은 겉으로는 ‘정의’나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말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지만, 그들의 내면을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각자 다른 욕심이 있었다.
변호사는 이기기 어려운 사건에서 승소해 스타가 되고 싶었고 기자는 멋진 특종을 잡아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은 직업적 성취를 이루는 동기가 되지만 지나치면 강박이나 집착이 된다.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한 그런 감정들은 결국 뻔한 범죄자를 앞에 놓고도 오해를 낳았다. 이 오해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쪽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으며, 그것은 결국 직업적 승리와는 별개로 삶의 패배를 낳았다.
타인을 정직하게, 아니 제대로 바라볼 수 있으려면 자기 내면의 불안을 먼저 없애야 한다는 것, 그럴 때 타인에 대한 입체적인 시각이 생긴다는 것을 두 영화는 말해 준다.
‘프라이멀 피어’의 마지막 장면에서, 절망하는 변호사를 향해 느물느물한 웃음을 던지며 내뱉는 살인자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나를 미워하지 말라고, 나 때문에 당신은 더 강해졌잖아.”
그의 말은 옳다. 강한 사람은 잘 속지 않는다. 사람에게도, 세상에도.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