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메타피지컬 클럽’…프래그머티즘 네 거인

  • 입력 2006년 5월 6일 03시 01분


◇메타피지컬 클럽/루이스 메넌드 지음·정주연 옮김/648쪽·2만2000원·민음사

187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하나의 모임이 있었다. 윌리엄 제임스와 올리버 웬들 홈스, 찰스 샌더스 퍼스가 거기에 속하였다.

‘메타피지컬 클럽’으로 불렸던 이 비공식 토론 모임은 고작 9개월 정도 지속되었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나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서 하나의 사상이 태어났다. 그것은 교육, 민주주의, 자유, 정의, 포용에 관한 미국인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으며 학문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문화적 다원주의를 ‘현대 미국’에 선물했다.

법학자 홈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 제임스, 화려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았던 기호학의 창시자 퍼스. 그리고 제임스의 충실한 계승자였던 철학자 겸 교육학자 존 듀이.

이들 네 사람은 사상이 ‘저 멀리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포크와 나이프 또는 마이크로칩과 같이 사람들이 세계에 대처하기 위해 고안해 낸 도구라고 생각했다. 사상은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는 게 아니라 세균처럼 인간이라는 매개체와 환경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사상은 단지 실재에 대한 일시적 반응이었다. ‘사상과 신념을 신성한 제단에서 끌어내려 인간적 수준으로 타락시켰다.’

이 책은 미국의 사상을 현대로 옮겨 놓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네 사람의 삶을 관통하며 오늘날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으로 불리는 ‘미국의 정신’이 그 선조들의 강렬한 삶으로부터 형성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다. 네 사람에 대한 전기이자 동시에 남북전쟁 이후 100년에 걸친 ‘현대 미국’의 탄생의 역사다.

저자는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책을 통해 미국 지성사의 네 거인에게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하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위대한 반대자’로 불리는 홈스의 취미는 독서를 빼고 연애밖에 없었다든지, 제임스는 연애에 관한 한 이미 다른 사람의 화살이 꽂힌 목표물만을 고르는 안타까운 버릇이 있었다든지, 말년을 모르핀에 기대었던 퍼스는 친구들이 거두어 준 돈으로 연명했다든지….

프래그머티즘의 면도날로 이 세계와 형이상학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도려내고자 했던 제임스. 그는 진리는 ‘유익한 것이라고 입증된 믿음’에 붙이는 이름이라고 공식화했다.

“예컨대 우리가 인과관계를 믿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이익이라고 우리의 경험이 말해 주기 때문이다. 인과관계는 현금 가치가 있는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과녁을 명중시킬 수 있다.”

듀이도 생각과 신념이 항상 이익을 위해 작용한다고 믿었다. 생각은 행위를 따라가는 사후의 ‘감언이설’ 같은 것이었다.

홈스 역시 철학과 논리학이 사람들의 실제 선택과 별로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판결을 내리고 이후에 원칙으로 정하는 것이 바로 관습법의 장점이다.” 퍼스에게는 생각은 물론 사물조차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 그 행위들의 합이었다.

네 사람의 사상은 연방주의의 지적 성공을 대표한다.

“우주는 다원적이다. 실재는 제각각이다. 사물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것과 함께 있고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은 없다. 다원주의적 세계는 제국이나 왕국보다 연방공화국에 가깝다.”

그들이 가르치고자 했던 사상의 근본 가치는 바로 관용이었다. 그들은 오류가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류에 대해 더 큰 사회적 여지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 19세기적 사고방식은 일방주의의 독단으로 흐르는 듯한 21세기의 미국에서도 살아남을 것인가?

1898년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필리핀 제도를 차지했을 때 일찍이 미국의 현대정신이 확장, 집적, 거대화를 향한 까닭 없는 충동에 휘말리고 있음을 우려한 것은 제임스였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모든 형태의 큰 것과 힘 있는 것에 반대하며, 수많은 연약한 실뿌리 혹은 작은 물줄기처럼 세계의 갈라진 틈새로 몰래 흘러나오는 개체에서부터 개체로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분자 같은 도덕적 힘의 편에 서 있다네….”

원제 ‘The Metaphysical Club’(2001년).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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