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非주류 인사들 한탕 노리고 조선行”

  • 입력 2006년 5월 9일 03시 00분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당시 조선 내 일본인은 54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부산 왜관에 있던 11만 평의 전관거류지에 거주하던 이들은 일제의 침략 마수가 구체화하면서 꾸준히 증가한다. 광복 직전 75만 명으로 일본의 작은 부현(府縣) 인구에 육박하게 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국제관계학)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는 최근 국내에 번역된 ‘식민지조선의 일본인들’(역사비평사·2002년)에서 이들이 일본 주류에서 소외된 인사들로 한국에서 ‘인생역전’을 노린 이가 많았다고 밝혔다.

초기 한반도와 가까웠지만 메이지(明治)유신에 상대적으로 뒤졌던 나가사키(長崎)와 구마모토(熊本) 출신이거나 하류노동자가 많았던 야마구치(山口) 출신이 많았다는 분석은 이를 뒷받침한다. 식민 후기엔 도쿄(東京) 등 대도시는 물론 홋카이도(北海道) 등 여러 지방에서 일본인들이 건너왔다. 1895년 20원 정도의 철물로 행상부터 시작해 10년 만에 ‘경성의 철물왕’이 된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같은 인물이 이들의 목표였다.

이들이 부를 축적한 방식은 농업과 광업, 공업 등 생산직 종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고리대금업과 전당포사업을 통해서였다. 고리로 농민들에게서 땅을 빼앗아 소작을 부리면서 자신들은 상업과 교통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했던 것이다. 일본 사회에서 이들의 열등의식은 조선인들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의식으로 표출됐다. “조선인은 소년시절에는 똑똑하지만 조혼이란 폐습과 온돌방에서 자면서 곧 바보가 된다”가 상식처럼 유포되고, 기차나 전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고 조선 노인을 폭행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군인과 경찰, 관료들뿐 아니라 이들 지배계층의 비호 아래 조선에 이식된 수많은 ‘풀뿌리 식민자’를 통해 확대 재생산됐다는 다카사키 교수의 섬세한 연구는 국내학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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