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박이화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 입력 2006년 5월 11일 03시 03분


후박나무 아래 잠들다 ― 박이화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이 세상 모든 죽음마저 꽃피워 줄 때

나 저 후박나무 아래 들겠네

그럴 때 통영군 연화리 우도의

저녁하늘 바라보던 내 눈은

후박나무 어린잎에게 주겠네

내 잠든 동안

저 푸른 후박나무 나를 대신할 수 있도록…

아, 살면서 누구보다 고온다습했던 내 생은

누구보다 먼저 후박나무 아래 썩겠네

그렇게 한 생쯤

내 몸도 꽃잎 아래 물컹,

향기롭게 썩었으면 좋겠네

기억나지 않는 꿈처럼 그대는 영영

아주 내게서 잊혔으면 좋겠네

다시 봄날이 와서

억세게 운수 좋은 어느 날

내게로 어떤 봄날이 와서

나를 저 후박나무 심장처럼 높이

꽃피워 줄 때까지

― 시집 ‘그리운 연어’(애지) 중에서

오월의 들판에 껌벅이는 후박나무 잎들이 앞서 잠든 누군가의 눈동자임을 알겠네. 죽어서 눈 뜨는 천수천안이라니 얼마나 ‘억세게 운수 좋은’ 일인가. ‘억세게 운수가 좋지 않더라도’ 모든 죽음은 꽃이 된다네. 어떤 죽음도 거름이 되고, 잎이 되지 않는 죽음은 없다네. 고온다습하지 않으면 생명이 아니라네. 뜨겁지 않으면 삶이 아니라네. 그러니 살아서 활활 타오르시게. 죽어서 남김없이 썩으시게. 온전히 잊어야 새로울 것이니, 갈 때엔 행여 애달픈 임도 사랑도 뒤돌아보지 마시게. 내생에도 저 높은 후박나무 심장을 쿵쿵 울려줄 사랑쯤이야 까치가 물고 오겠지.― 시인 반칠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