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청록집’ 쓸쓸한 환갑잔치

  • 입력 2006년 5월 11일 03시 03분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파르라니 깎은 머리/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두 볼에 흐르는 빛이/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의 ‘승무’)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박두진의 ‘묘지송’)

박목월(朴木月·1916∼1978) 조지훈(趙芝薰·1920∼1968) 박두진(朴斗鎭·1916∼1998)의 3인 시집 ‘청록집(靑鹿集)’이 환갑을 맞았다. 1946년 6월 6일 출간된 이 시집에는 ‘나그네’를 비롯해 조지훈의 ‘승무’, 박두진의 ‘묘지송’ 등 서정시 39편이 실렸다. 이 시집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집으로 시단의 한 전통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다.

지금도 많은 시 애호가가 청록집에 실린 시를 좋아하지만 문단에선 청록집이 거의 잊혀진 나그네 신세다. 출간 60주년 기념행사나 글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월간 ‘현대시학’이 다음 달 ‘청록집 출간 60주년 특집’을 준비하는 정도다. 한국시인협회는 10월에 열릴 ‘태백산 시 낭송 행사’ 때 청록집 수록 시를 낭송하려다가 행사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했다.

왜 이렇게 청록집의 환갑이 스산할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세 시인이 고향도, 재직했던 대학도 다르기 때문에 마땅히 기념행사를 추진할 주체가 없다는 게 문인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문단 주도세력 가운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아서”다. 평론가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1980년대 민중시가 시단의 주요 흐름이 되면서 자연을 예찬하거나 인생을 성찰하는 시풍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이후 청록집의 세 시인에 대한 관심이 약화됐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2000년대 들어 ‘실험시’가 대거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서정시인 청록집은 더욱이나 주목받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

시인 오세영 서울대 교수는 “박목월 시인이 육영수 여사에게 문학 강의를 했다는, ‘유신체제 가정교사’라는 인식 때문에 현대 시사에서 외면받았다”며 “시집 자체보다 안팎으로 얽힌 이유로 인해 교과서에서는 높이 평가되는 청록집이 문단에서는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평론가인 최동호 고려대 교수는 “시가 무엇인가, 서정시의 갈 길이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시각에서 더 늦기 전에 청록집의 의미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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