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카를 포퍼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1권(민음사)을 다시 번역해 펴낸 이한구(철학)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의 현실을 이렇게 진단했다. 이 교수는 1982년 이명현(철학) 서울대 교수와 함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처음 국내에서 번역 출간했다.
안식년을 맞아 미국 위스콘신대에 머물고 있는 이 교수는 15일 전화 인터뷰에서 개정판을 낸 소감에 대해 “포퍼의 방대한 주석까지 포함한 개정판을 내겠다던 독자와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 못지않게 열린사회의 새로운 적들의 도래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98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경원(敬遠)의 대상이었다.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개인주의를 지향하고,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사회’를 뜻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대철학자의 ‘열린사회’란 개념은 “혁명 대신 개량주의를 부추기는 주장”으로 비난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책은 1990년대 초 공산권의 몰락을 통해 그 진가를 여실히 입증했다. 1945년 파시즘의 종언을 지켜보면서 출간됐던 이 책이 반세기 만에 파시즘과 더불어 열린사회의 적으로 규정했던 마르크스주의의 패배까지 목도하는 영광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첫 번역 출간 후 24년이 흘렀지만 한국 사회는 아직도 ‘우리는 진정한 열린사회인가’란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의 유령’이 사라진 지금, 왜 아직도 ‘열린사회’가 화두로 남아있는 걸까.
이 교수는 포퓰리즘, 폐쇄적 민족주의, 종교적 원리주의라는 새로운 세 가지 잠재된 적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인터넷 시대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여론을 호도하고 사회를 조종하려는 세력이 늘고 있는 지금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제1의 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포장하지만 아무런 책임이 따르지 않는 익명성은 결국 감성과 충동에 의해 지배받는 사회를 만듭니다. 이야말로 포퍼가 열린사회의 특징으로 그토록 강조한 ‘비판적 합리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 교수는 그 다음으로 폐쇄적 민족주의와 종교적 원리주의를 지적했다. 민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폐쇄적 민족주의는 보편적 윤리 및 인권과 함께 나란히 전진할 수 없고, 종교적 원리주의는 관용과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부정·비판하고, 그에 대비되는 이상(유토피아)의 실현을 절대시하는 플라톤류의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에 대한 포퍼의 통찰은 특히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2권의 개정판을 준비 중인 이명현 교수도 15일 “이 책은 포퓰리즘이나 폐쇄적 민족주의와 같은 ‘새로운 적’에 대한 비판적 통찰 때문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라는 ‘오래된 적’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론상 사회주의는 국제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폐쇄적 민족주의를 배격하며, 포퓰리즘이 아니라 계급의 이익에 투철해야 한다”며 “그러나 후진적 사회주의일수록 민족주의나 포퓰리즘과 결탁하는 양상을 뚜렷이 보이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북한이며, 한국의 좌파 역시 민족주의 및 포퓰리즘과 결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해방 공간 이래 가장 치열한 좌우 갈등이 펼쳐지는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있는지를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 카를 포퍼(1902∼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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