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부터 6월이면 센트럴파크 내 델라코트 극장에서는 한 달 가까이 셰익스피어 연극 축제가 열린다. 매년 8만여 명이 관람하는 이 연극제의 티켓은 선착순으로 무료 배부된다. 혼잡을 피하려고 주최 측은 공연 시작 달포 전부터 매일 오후 2시간씩 표를 나눠 줘 올해도 5월 셋째 주 현재 2006년 작 ‘맥베스’의 티켓이 배부되고 있다.
센트럴파크 셰익스피어 축제에 뉴욕시민이나 관광객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출연진 때문이다. 해마다 이 공연에는 할리우드 스타들이 등장한다. 모건 프리먼, 메릴 스트립, 덴절 워싱턴, 케빈 클라인 같은 아카데미 수상자부터 젊은 내털리 포트먼까지…. 할리우드 수준의 출연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자칫 무대에서 실수라도 했다간 상어 떼 같은 연극 평론가들의 먹이가 되기 십상인데도 스타들은 ‘사서 고생’을 한다. 셰익스피어를 연기의 원점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리처드 3세’를 소재로 1996년 다큐드라마 ‘리처드를 찾아서(Looking for Richard)’를 만든 알 파치노도 바로 이 뉴욕의 셰익스피어에서 출발했다. “‘리처드 3세’는 탄생 4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알 파치노는 영국으로 날아가 작품 배경인 성(城)을 찾고, 역사학자들을 만나 당대 풍경을 재구성했으며, 셰익스피어 극 전문 배우들에게서 연기지도를 받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리처드를 찾아서’는 학회에서도 ‘자료’로 인정한다.
13일 타계한 ‘한국 최초의 햄릿’ 김동원 선생도 자료 모으기에 관한 한 연구자의 꼼꼼함을 앞서는 배우였다. 1962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후원금을 받아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인 드라마센터를 서울 남산 자락에 세울 때, 재단 측에 ‘한국에도 연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증빙했던 자료는 바로 선생이 일제강점기부터 모아 둔 공연 팸플릿과 사진이었다. 선생은 이 일을 두고 자서전에서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 현재와 미래가 있기 때문”이라며 “예술인들도 공연 자료 정리에 관심을 가지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선생의 당부는 여전히 무색하다. 여성 무대미술가로 40년을 살아온 팔순의 이병복 씨는 이달 말 자신이 만들어 온 무대의상 등 1000여 점을 모아 전시회를 연 뒤 불살라 버리겠다고 선언했다(본보 15일자 A23면 참조). 작품들이 제대로 보관되지 않고 천덕꾸러기가 되는 꼴을 보느니 살아서 자신의 손으로 ‘정리’하겠다는 것이다. 이 씨 설득에 나섰던 문화관광부 관계자조차 “오래전부터 우리 공연사의 산 증거를 모아 둘 공연예술박물관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해 왔지만…”하며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요원함을 시인했다.
원조 받아 극장 짓던 시절은 졸업했고 이제는 서른 해 묵은 고급 위스키도 돈만 있으면 척척 사 마시게 된 대한민국. 그러나 사후 400백 년이 가깝도록 축적된 과거를 바탕으로 거듭 새로 나는 ‘셰익스피어의 전통’은 돈으로도 살 수 없고, 훔쳐 오려고 해도 훔쳐 올 길 없는 자산이다.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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