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다의 아버지 올리버 브라운은 딸을 섬너 초등학교로 전학시키려 했지만 교장은 입학을 거절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브라운은 소송으로 맞섰다. 유명한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은 3년을 끌었고 1954년 5월 17일, 미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는 위헌’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린다. 1896년 ‘플레시 대 퍼거슨’ 사건에서 ‘분리하되 평등한’ 교육시설의 제공을 지지함으로써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합법화한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흔히 ‘브라운 판결’이라 불리는 이 역사적 결정을 통해 얼 워런 대법원장은 그때까지 백인 흑인 학교를 따로 운영하던 남부의 주 정부들에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인종별 학교를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남부의 주들은 완강했다. 판결 이후 3년간 남부지역 백인학교 3000여 개 중 인종 분리를 폐지한 학교는 600여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브라운 판결’은 공공시설에서의 인종의 벽을 허무는 민권운동에 불을 질렀다.
판결 이듬해인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42세의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버스에서 흑인 좌석으로 옮겨 앉기를 거부하다 투옥됐고 분노한 흑인들은 승차 거부에 들어갔다. 1960년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린즈버러에서는 흑인 대학생들이 백인 전용 식당 이용을 요구하면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민권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1964년에는 흑인에게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한 민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브라운 판결’을 내린 워런 대법원장은 ‘미란다 사건’ 등 인권 향상에 기여한 진보적 판결로 미국 사회를 바꿔놓았다. 훗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워런을 대법원장에 임명한 것은 나의 최대 실수”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미국 언론은 여전히 대도시 공립학교에는 유색 인종이 많은 반면 백인 부유층의 자녀들은 백인만으로 구성된 사립학교에 다닌다면서 흑백 분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워런 대법원장이 살아있다면 어떤 판결을 내릴지 궁금하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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