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당한 설정 속 ‘진짜’ 가족 의미 찾아
여기 3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있다.
분식점 주인인 노처녀 미라(문소리) 앞에 5년간 소식이 없던 남동생 형철(엄태웅)이 나타난다. 형철은 “얼마 전 결혼했다”면서 스무 살 연상인 아내 무신(고두심)을 소개한다. 황당해하는 미라. 이들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취업 준비 중인 선경(공효진)은 지나친 로맨티스트인 엄마 매자(김혜옥)에 대해 불만이 많다. 엄마는 유부남과의 사이에 아이도 있다. 매사가 짜증나는 선경은 남자친구 준호(류승범)와의 사랑도 어렵기만 하다.
이번엔 경석(봉태규)과 채현(정유미) 커플이 있다. 경석의 고민은 채현이 너무 사랑이 많은 여자라는 점. 어떤 남자에게도 너무나 크고 뜨거운 사랑을 베푸는 채현 때문에 경석은 고민에 빠진다.
‘가족의 탄생’ 속 설정들은 황당무계하고 당혹스러우며 천연덕스럽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이야기가 갖는 모난 표면들을 신비롭게 다듬어 감성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이 영화는 일상을 묘사하는 대목에선 익숙한 이야기를 익숙하지 않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극적 재미와 섬세한 결을 살린다. 또 감정을 자아내는 대목에선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익숙하게 풀어내는 방식을 통해 삶의 공기를 실어낸다. 유머는 현실적이고, 여백은 지적이며, 터치는 감성적이다.
이 영화 속에는 사랑에 대한 온갖 역설이 들어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 없으며, 또 사랑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하는 그 지긋지긋한 사랑의 패러독스 말이다. 영화는 그러면서 ‘핏줄’만이 가족의 유전자(DNA)라고 여겨왔던 우리 자신의 뒤로 은근슬쩍 다가와 ‘똥침’을 날리며 묻는다. 피보다는 사랑이 더 중요한 거 아니에요 하고 말이다. 남동생이 왼쪽엔 (애인처럼 보이는) 누나를, 오른쪽엔 (엄마처럼 보이는) 아내를 낀 채 셋이서 다정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이 영화 속 장면은 아마도 올해 한국영화가 길어낸 최고로 황당무계하고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 부드러운 연출, 최고의 연기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년) 이후 무려 6년 만에 장편 극영화를 내놓는 김태용 감독의 재능은 지혜로운 위장술에 있다. 오랜 시간 별러왔던 ‘티’를 내지 않고 마치 가벼운 소품을 던져놓는 척하는 것이다. 대안과 담론의 몸무게를 줄인 채 뭔가를 주장하고 싶은 욕구를 자기절제로 이겨내면서 끝을 살짝 열어놓는 이 영화의 태도는 ‘옳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크게 외치고 보는’ 요즘 세상에서 의미 깊은 마음의 울림을 만들어 낸다.
고두심은 역시 최고의 배우다. 고두심과 엄태웅의 나이 차는 영화에서보다 많은 스물세 살이지만, 극중 두 사람이 빚어내는 ‘잠자리’의 소리는 그 어떤 대화보다 당혹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화음이다. 매사에 황당해하는 봉태규의 표정은 잔잔한 일상 속에서도 감정적 스펙터클을 길어 올리고, 공효진과 정유미의 연기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이만한 영화라면 용기를 줄 만하다. 앞뒤 재지 말고, 사랑한다면, 저지르라는…. 그래서 가족이 아닌가. 18일 개봉.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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