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감]7시간 반 최장 공연 러 말리극장 ‘형제자매들’

  • 입력 2006년 5월 22일 02시 59분


20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형제자매들’의 한 장면. 옛 소련 집단농장의 여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 아들을 그리며 노래하며 시름을 달래고 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20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형제자매들’의 한 장면. 옛 소련 집단농장의 여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간 남편, 아들을 그리며 노래하며 시름을 달래고 있다. 사진 제공 LG아트센터
《화창했던 토요일(20일) 낮,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 로비는 북적댔다. 국내 공연 사상 최장 시간이라는, 러시아 말리극장의 7시간 반(휴식시간 제외하면 5시간 20분)짜리 내한 공연 ‘형제자매들’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오후 2시 반에 시작해 10시까지 계속되는 만만치 않은 연극이건만, 1000석 규모의 공연장은 빈 좌석이 거의 없었다. 》

LG아트센터 측은 “이틀 공연(총 2000석)을 합쳐 100석도 채 남지 않고 모두 팔려 나갔다”고 밝혔다. LG아트센터가 초대권을 거의 발행하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90% 이상이 5만∼9만 원의 티켓을 구입한 유료 관객인 셈. 연출가, 기획자, 연극 관련 교수·학생 등 연극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순수한 연극 애호가도 많았다.

‘마라톤 관람’을 위한 준비도 철저했다. 초콜릿 등 가벼운 간식과 생수를 가져온 관객은 물론, 공연 도중 저녁을 먹어야 하는 점을 고려해 칫솔까지 챙겨 온 여성도 많았다. 번역 자막을 읽느라 눈이 피로할 것을 대비해 식염수를 준비해 왔다는 이인호 전 주러시아 대사도 눈에 띄었고, “졸릴까 봐 알싸한 목캔디를 가져왔다”는 공연기획자도 있었다.

오후 2시 반. 1부 1막 ‘만남과 이별’의 막이 오르며 연극이 시작됐다. 표도르 아브라모프의 4부작 소설 중 1∼3부를 무대로 옮긴 ‘형제자매들’은 세계적인 연극연출가 레프 도진의 대표작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 시베리아의 어느 콜호스(집단농장) 농민의 생활상을 그려낸 연극이다.

4시 20분. 20분간의 첫 중간휴식. 관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통나무 세트 하나만을 눕히고 세우고 뒤집고 기울여서 농장, 집, 부두 등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효율적이고 우직한 연출과, 20년간 함께 작업해 온 배우들의 숙성된 연기가 주 화제였다.

오후 5시 반, 2막이 끝나고 1시간 반의 저녁 식사 시간이 주어졌다.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한겨울 러시아 벌목장의 삶에 몇 시간째 젖어 있다 나오니 훤하고 분주한 서울 거리가 순간 낯설었다.

안호상 예술의전당 예술사업국장은 “겨울이면 오후 3시부터 어둑한 러시아에서는 이런 긴 연극이 흔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낮부터 연극을 보고, 연극을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다시 연극을 보러 가는 것만도 신선한 체험이자 문화 충격일 것”이라고 했다. 그 말 위로 극중 주인공 미하일이 새 옷에 들뜬 어린 여동생을 보며 했던 대사가 겹쳐졌다. “이런 게 제대로 사는 게 아닐까? 새 옷에 기뻐할 줄 알고,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

오후 7시. 2부가 시작됐다. “1부 끝나고 돌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던 연출가의 장담처럼 좌석은 다시 꽉 찼다. 식후 관객을 위한 배려였는지, 2부는 1부에 비해 가벼웠다. 공연 시작 6시간째, 다시 20분 중간 휴식이 있었다. 배우의 체력에 대한 감탄도 이어졌다.

오후 10시 10분. 마침내 연극은 끝났다. 우리네 삶과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전후 러시아 농민들의 삶은 어느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인간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바뀌어 있었다. 경기 군포시에서 혼자 이 연극을 보러 왔다는 김미남(39) 씨는 “7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며 “삶에 대해,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해 준 작품”이라고 말했다.

연출가 겸 극작가 장유정 씨는 “요즘 대학로 연극들은 ‘관객을 위해서’ 공연 시간을 1시간 반으로 맞추려는 추세지만 ‘형제자매들’은 공연의 ‘길고 짧음’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작품 내용임을 다시 일깨워 줬다”고 말했다.

관객은 모두 일어나 TV나 영화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느리고 진지한’ 연극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관객의 환호에 배우들은 6차례, 연출가는 3차례나 무대로 불려 나왔고 기립박수는 5분여 동안 이어졌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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