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한순간은 때론 인생의 전부이기도 하다. 영화 ‘카포티’는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순간 포착을 통해 일생이라는 긴 시간과 영혼이라는 잡히지 않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영화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인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가 소설 ‘인 콜드 블러드(In Cold Blood·냉혈한)’의 집필에 들어가 완성하기까지의 6년 동안에 초점을 맞춘다.
1959년 미국 캔자스 주. 한 농가에서 일가족 4명이 두 괴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재능 있는 작가 카포티(필립 시모어 호프먼)는 이야깃거리를 얻어내려고 사형선고를 받은 범인들을 만난다. 범인 중 내성적인 페리에게 접근한 카포티는 페리가 고백하는 어두운 과거를 글로 옮겨 큰 인기를 얻지만, 페리는 사건 당일 이야기만은 끝내 함구한다. 결국 사형집행을 2주 앞두고 카포티는 페리에게서 사건에 얽힌 비밀을 전해 듣는다. 그리고 사형집행일이 다가온다.
배우 호프먼의 연기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경험’이다. 이 영화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그는 목구멍 끝에 소리를 대롱대롱 매달아 발음하는 방식으로 카포티의 가늘고 높은 음성을 재현해 낸다. 그는 화면을 장악하려 드는 대신, 화면에서 스스로가 영원히 사라지기를 염원하는 듯 말하고 움직인다. 그림자 같은 그의 연기는 스산하면서도 지울 수 없는 존재감으로 각인된다.
호프먼의 이런 연기는 영화의 전체적인 공기와 절묘하게 만난다.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는 차가운 말투로 이야기를 건네면서 결국엔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것이다. ‘카포티’는 미스터리 구조의 화법을 애당초부터 내다 버린 채 이야기를 일부러 평평하고 단선적으로 끌고 가는데, 감정몰이를 절제한 채 관객의 감성이 스스로 움직일 여백을 오롯이 만들어 내는 영화의 섬세함은 선악을 산뜻하게 규정하는 그 어떤 영화보다 강한 흡인력이 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페리를 이용한 카포티가 비겁한 인간이라는 판단도, 무자비한 살인행각을 벌인 페리가 ‘인간 말종’이라는 결론도 결코 쉽게 내릴 수는 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어쩌다가, 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순간이 다가온다고 말이다. 전국 CGV 인디관(상암 강변 서면 인천)에서 25일 개봉. 15세 이상.
■ 두 마음의 욕망… ‘친밀한 타인들’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대한 고민으로 정신과 의사를 찾기로 결심한 안나(상드린 보네르). 그는 오피스텔의 방 번호를 착각해 그만 재정상담사인 윌리엄(파브리스 루치니)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안나는 다짜고짜 은밀한 사생활을 털어놓기 시작하고, 안나의 이런 모습이 싫지 않았던 윌리엄은 모른 체하고 이야기를 들어준다. 안나의 ‘상담 행각’은 이어지고 어느 날 안나의 남편이 윌리엄 앞에 나타난다.
이 영화는 비현실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 설정을 통해 가벼운 농담을 주섬주섬 던지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지만, 알고 보면 남녀 간 사랑에 대한 무섭도록 놀라운 진실을 묻어 두고 있다. 사랑보다 중요한 건 친밀함이며, 친밀함은 그저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들어주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말이다. 영화는 ‘말하기 좋아하는 여자’와 ‘듣기 좋아하는 남자’, ‘친밀하지 않은 남편’과 ‘친밀한 타인’, 그리고 ‘친밀함’과 ‘사랑’의 절묘한 대비를 통해 일반적인 로맨스 영화가 던지는, 딱 떨어지는 해피엔딩에서 한 발짝 더 나간다.
‘친밀한 타인들’의 매력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들 속에서도 두 남녀가 시종 단 한마디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두 사람의 시선이 잠깐 흔들리고 입맛을 순간적으로 다시는 표정을 고스란히 잡아내면서도 끝내 그들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전지적 시선을 거부한 채 알 듯 모를 듯한 절묘한 거리두기를 이어간다. 세상엔 비록 악수밖에 나누지 않는 남녀지간이지만 섹스보다 더 야한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끝난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의 파트리스 르콩트 감독. 서울 씨네큐브 단독 개봉.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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