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의 특강은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한 후학들에게 거침없이 맨살을 드러낸 것과 다름없었다. 1968∼2001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김 교수는 ‘읽다’라는 말의 동의어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독서량과 그에 필적할 저술 활동을 통해 국문학사의 재정립과 문학비평 활동에 매진해 왔다.
“1926년 세워진 경성제국대 법문학부의 조선어문학 전공생(1회)이었던 도남 조윤제(1904∼1976)는 우리 인문학계에서 독창적 이론을 창시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향가에서 발견한 ‘반절성론(한국 시가·詩歌는 반으로 쪼개진다)’과 ‘전절소후절대론(그 절반의 앞은 짧고, 뒤는 길다)’은 고려가요와 시조에까지 적용할 수 있는 일반규칙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그 도남이 국문학을 ‘국어(한글)로 표현된 문학’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쓴 국문학사에서 한문학 작품을 솎아 낸 것은 바로 일본의 식민사관과 처절한 투쟁을 펼친 독립운동의 일환임을 상기시켰다. 식민사관과의 투쟁은 도남과 김 교수 자신의 세대에 절체절명의 과제였다는 것. 독백이 이어졌다. “나하고 죽은 김현이 함께 쓴 ‘한국문학사’는 실은 김용섭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쓴 겁니다.”
한국에서 근대의 씨앗이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김용섭(사학) 연세대 명예교수의 내재적 발전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의 기원을 18세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를 통해 ‘조선근대문학은 서구문학의 장르를 형식으로 하는 조선의 문학’이라는 임화(1908∼1953)의 규정을 극복할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때문에 임화를 얼마나 미워했는데”라는 김 교수의 독백은 다시 “아,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고생해서 뒤집어 놓은 것을 다시 뒤집겠다니 안병직이가 정말 때려주고 싶을 만큼 미워 죽겠다”는 말로 이어졌다. 근대화가 조선후기 내재적 발전으로 성취될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에 배태됐다는 안병직(경제학) 서울대 명예교수의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진솔한 반응이었다. 김 교수와 안 교수는 동년배로 김용구 한림과학원장과 셋이서 자주 어울리는 친구 사이다.
노학자의 포용력이 빛난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안 교수에 대한 솔직한 발언에 폭소를 터뜨리던 청중은 이어진 얘기를 듣고 깊은 침묵에 휩싸였다.
“카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한 ‘진리는 반증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 진리’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반증가능성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오.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진리가 진리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과 같은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김윤식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진리가 역사적 속견(俗見)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용인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역사의 종착역이 아닌 수많은 간이역 중 하나로 바라보는 시각을 수용하겠다는 원숙한 고백이었다.
거기에는 당대적 시대 고민에 대한 존중을 결여한 우리 학계의 풍토에 대한 아쉬움도 담겨 있었다. 우리 한문학의 문학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를 국문학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도남의 고뇌를 김 교수가 읽어 내듯이, 내재적 발전론의 취약점을 짐작하면서도 이를 깊숙이 포옹할 수밖에 없었던 김 교수 세대 학자들의 지적 고뇌의 맥락을 우리가 읽어내고 있는가. 김 교수는 농반 진반으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힘겹게 구축한 진리가 진리로 통용될 수 있었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도 가능했던 거요. 이제 당신들의 차례요. (우리 세대의 진리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못해도 국민소득 3만7000달러 시대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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