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 배 속에서 쌍둥이였던 아이 중 하나가 유산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한일관계의 뿌리를 파헤쳐 갈수록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 그런 배니싱 트윈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한일관계사학회(회장 연민수)의 학자 54명이 필자로 참여해 한일관계사를 고중세편, 근세편, 근현대편으로 나눠 가장 궁금한 98개의 주제로 정리한 이 책에서도 그 배니싱 트윈에 대한 애증을 읽을 수 있다.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무리 지어 일본열도로 건너갔다. 이들은 기원후 3세기까지 600여 년간 야요이(彌生)문화라는 청동기·철기 문명을 이뤘다. 이 야요이인들은 원주민격인 조몬(繩文)인을 몰아내고 오늘날 일본인의 조상이 됐다.
이 책은 이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나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의 고대 역사가 밀접한 연관을 맺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일본)는 백제·가야와 밀접한 동맹관계를 맺었다. 칠지도는 백제와 왜의 동맹의 상징물이었고,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여러 나라에 파견된 왜의 외교사절이었다. 또 신묘년조 기사는 고구려가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을 위해 왜를 과장되게 묘사한 것이다.
배니싱 트윈의 역사는 663년 왜가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2만70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가 백촌강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시작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패퇴한 도래인이 대거 유입된 일본은 이후 자신들의 기억에서 한반도의 영향 자체를 부정하는 ‘역사 다시 쓰기’를 시작한다. 이런 나쁜 추억은 원에 등을 떠밀린 고려의 일본 침공 시도와 임진왜란을 통해 악화된다.
임진왜란은 쌍둥이 중 한 명이 다른 쌍둥이의 태반을 빼앗아 흡수하려드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10만 명 이상의 코를 베어 만든 일본의 귀무덤(耳塚)과 1만 권 이상의 책과 학자, 도공 그리고 엄청난 문화재 약탈로 한쪽은 쇠락해 간 반면 다른 한쪽은 새로운 문명의 토대를 마련한다. 이는 19세기 말 이후 다시 시작된 일본의 한국 침략으로 이어지면서 배니싱 트윈의 역사는 ‘배싱 트윈(bashing twin·쌍둥이 때리기)’이라는 가학적 양상으로 변모한다. 이 책의 부제에 쓰인 ‘보이는 역사’가 배싱 트윈의 역사라면 ‘보이지 않는 역사’는 곧 배니싱 트윈의 역사가 아닐까.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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