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영화는 인종문제를 걷어내면 자식이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 사회 밑바닥 소수인생의 고통을 다뤘다는 점에서 인문학적인 영화다. 피부색을 걷어내고 모든 인간의 내면을 동일한 시선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인종문제를 다룬 영화의 한 단계 진화로 볼 수 있다. 풍요와 번영의 삶을 구가하는 미국인들 역시 인간 삶의 공통분모인 다종다양한 내상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뉴저지 주 흑인과 백인의 거주지가 인접한 뎀프 시의 병원 응급실에 백인 여성 브렌다 마틴(줄리앤 무어)이 양손에 흥건하게 피를 묻힌 채 비틀거리며 들어선다. 흑인 남자가 자신의 차를 강탈해갔으며, 차 안에는 네 살배기 아들까지 타고 있었다고 말한다.
흑인 거주지역인 암스트롱에서 흑인 범죄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백인 경찰들은 이 지역을 아예 봉쇄해버리고 암스트롱 주민의 불만은 폭동 수준에까지 이른다. 사건을 맡은 흑인 형사 로렌조(새뮤얼 잭슨)는 평소 흑인 청소년 범죄에는 무심하다가 백인 아이 실종사건에는 열심이라는 이웃들의 비아냥거림까지 들으면서 사건에 열정적으로 매달린다.
그러나 수사망이 점점 좁혀질수록 당초 신고를 한 브렌다에게 의심의 눈길이 쏠리고 로렌조는 마침내 드러난 진실 앞에서 당혹스러운데….
무엇보다 이 영화의 볼거리는 모건 프리먼과 함께 흑인 연기파 배우로 손꼽히는 새뮤얼 잭슨과 ‘파 프롬 헤븐’ ‘디 아워스’ 등에 나온 줄리앤 무어의 호연이다. 특히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사회의 냉대와 차별에 익숙해진 줄리앤 무어가 펼치는 혼돈스럽고 방황하는 표정 연기는 영화 전체를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로렌조 역을 맡은 새뮤얼 잭슨은 온갖 불화와 충돌 속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냉철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무한한 휴머니즘을 가진 현자(賢者)로 나온다.
“이 도시에서 22년간 경찰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보게 되는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게 만들어요. 하지만 난 신을 믿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은 그것이 좋건 나쁘건 신이 뜻했기 때문이라오.”
사건을 파헤쳐야 할 임무를 가진 그이지만, 브렌다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다그치지 않는다.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는 브렌다의 내면을 먼저 읽고 사회와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그녀의 영혼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말하면서.
“삶은 우리가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이해할 수 없어져요. 때론 그냥 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냥 내버려둬요.”
상업적 흡인력으로 강력한 메시지까지 갖고 있는 영화지만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담으려 해 좀 뒤죽박죽이 된 측면이 있는 게 아쉽다. 9일 개봉. 15세 이상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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