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으로서 최초로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생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플리퍼는 1856년 조지아 주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노예였다.
그는 노예제 폐지를 놓고 다투었던 남북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끝난 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웨스트포인트에 입교하는 기회를 얻는다. 웨스트포인트에는 이미 흑인 4명이 입교한 상태였지만 이들은 흑백 차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중퇴했다.
플리퍼의 웨스트포인트 시절은 철저히 격리된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백인 생도들은 플리퍼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편견과 멸시로 모욕당하기 일쑤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877년 6월 15일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그는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첫 배속지는 제10기병대, 흑인만으로 편성한 부대였다. 플리퍼는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의 벽을 뛰어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진급 자격은 충분했지만 늘 최종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881년 플리퍼는 엉뚱하게도 병참 자금 횡령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회계장부에 기록된 액수에 이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공격당할까봐 숨겨 온 것이 죄라면 죄였다.
횡령 혐의는 벗었지만 그는 장교로서 부적절하다는 판결을 받고 이듬해 불명예제대를 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인생에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민간인이 된 뒤 그의 경력은 화려했다. 광산기술자로 일한 그는 1940년 84세로 숨질 때까지 상원 외교위원회의 멕시코 전문가, 내무장관의 특별보좌역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백방으로 뛰어 보았지만 불명예제대의 굴레에서는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미 육군은 그가 숨지고 36년이 지난 1976년에야 명예제대증을 발행해 그의 명예를 회복해 주었다. 웨스트포인트에는 그의 흉상도 세워졌다.
1999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유족을 백악관에 초청해 완전 사면을 선언하고 117년간 방치해 온 정부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었다.
최근 웨스트포인트 생도 가운데 백인이 아닌 생도의 비율은 20%가량 된다. 올해 졸업생 861명 중에는 흑인 47명, 아시아계 65명, 히스패닉계 50명, 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2명이 포함됐다. 여성은 1976년부터 입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올해 졸업생 중 131명이 여성이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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