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공감]“그림을 그리는 건 또다른 수행이지”

  • 입력 2006년 7월 1일 03시 12분


화단의 두 거목 박서보(왼쪽), 서세옥 화백이 전시장에 걸린 상대방의 그림 앞에 나란히 섰다. 사진 제공 이화익갤러리
화단의 두 거목 박서보(왼쪽), 서세옥 화백이 전시장에 걸린 상대방의 그림 앞에 나란히 섰다. 사진 제공 이화익갤러리
지난달 29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송현동 이화익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과 중진’전 오프닝 행사. 2층 전시장에 들어서는 한 남자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됐다. 진분홍 반소매 티셔츠에 아이보리 면바지, 어깨를 가로질러 멘 프라다 가방까지. 눈에 확 띄는 경쾌하고 발랄한 차림새의 주인공은? 바로 고희를 훌쩍 넘긴 박서보(75) 화백이었다.

이번 전시는 박 화백을 비롯해 1950, 60년대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어 온 정창섭(79), 윤형근(78), 서세옥(77), 김창열(77) 김봉태(69), 이규선(68) 화백 등 7인의 작품 2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모두 독자적인 작품을 통해 한국적 모더니즘 미학의 회화세계를 구축한 작가다. 화랑가에 젊은 작가들의 전시는 줄을 잇지만 이렇듯 칠순 전후 작가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기회는 드물다. 이 자리에는 박 화백과 프랑스에 머물다 잠시 귀국한 김창열 화백 부부, 김봉태 이규선 화백 등 작가, 미술평론가 오광수, 김종규 박물관협회장, 이규일 미술사랑 대표 등이 참석해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챙겼다.

며칠 앞서 서세옥 박서보 김봉태 이규선 화백은 점심 식사를 함께하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연배가 좀 낮은 김, 이 화백은 선배들을 깍듯이 대하며 말을 아꼈고, 주로 산정(서세옥)과 박 화백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 번의 붓질로 우주만물을 담아내는 산정, 연필이나 철필로 반복해 선을 긋는 묘법의 박 화백. 작품만큼이나 겉모습도 대조적이었다. 이날 흰 셔츠에 둥근 뿔테 안경을 쓴 산정이 흔들림 없는 꼿꼿한 선비를 연상시켰다면, 빨강 마직 남방에 피카소 같은 삭발 스타일의 박 화백에겐 열정이 넘쳐흘렀다.

서울대 출신으로 한국화에서 비구상적 추상의 길을 제일 먼저 시도한 산정.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은 수렁에 빠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한번 빠지면 다른 것은 할 수 없다”고 말했다. “1년에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 나오면 다행이지 뭐. 그리자마자 ‘됐다’ 싶은 게 있는가 하면 1년 내내 그려도 다 휴지가 되기도 해.”

홍익대 출신으로 국내 모노크롬(단색조) 추상미술의 대부 격인 박 화백. “날마다 하루 평균 14시간씩 그림을 그려요. 결국 재주란 아무것도 아니거든. 재주 있는 놈이 노력해야 뭐가 되는 거지.”

“내 그림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중간”이라는 산정, “내 작업은 목탁을 두드리듯 반복되는 행위에서 나를 비워 내는 것, 그림은 수신의 도구”라는 박 화백. 그러고 보니 매체는 달라도 공통점이 보였다. 바로 ‘정신의 깊이’를 추구한다는 점. 또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도전정신, 그리고 유머 감각이 번뜩이는 솔직담백한 대화 스타일.

“박 선생은 나한의 두상이야. 여기에 한 가지만 더 있으면 되는데. 두드리는 거 있잖아.(웃음)”(서) “누가 빨강을 몸에 지니라고 해서 미국서 빨간 팬티를 보고 15개나 사왔더니 마누라가 미쳤느냐고 하더라고.(웃음)”(박)

두 대가는 여전히 젊다. 앞으로 선보일 작품이 더 기다려지는 이유다. 12일까지. 02-730-7818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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