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기를 몰래 보는 일은 어릴 적이나 커서나 마찬가지로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에 쓰인 한 사람의 일기를 볼 수 있다면 그 흥미는 배가되지 않을까. 1513년부터 1577년까지 살았던 선비 유희춘은 거의 매일 자신이 겪은 일을 마치 ‘일지’를 쓰듯이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미암일기’다. 그런데 국문학자인 정창권 박사는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본인이 수집한 자료를 보태서 새로운 이야기책을 만들어냈다.
현재 전해지는 ‘미암일기’는 유희춘이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칠 즈음인 1567년 10월 충청도 은진의 유배소에서 적은 내용에서 시작한다. 정창권의 책 역시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와서 관직 생활을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 책의 첫머리는 1567년 음력 11월 5일 유희춘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인 대공을 불러 세수 준비를 시키고, 아침을 어떻게 먹고, 무엇을 타고 궁궐로 행차하는지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미암일기’에서 유희춘은 이날의 일기에 “날씨가 갬. 아침 강의를 위해 먼동이 트기 전에 의관을 정제하고 궁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고만 썼을 뿐이다.
결국 정창권은 이 책에서 사료에만 매달리는 역사학자와 달리 문학적 상상력을 개입시키는 모험을 시도한다. 이런 모험은 책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유희춘이 1571년 음력 5월 11일 전라감사로 전주에 있을 때, 한양에서 관리 박화숙이 공무로 전주에 온다. 그래서 매월루에서 잔치를 베푸는데, 박화숙이 유희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미암일기’에 적혀 있다. “나더러 평생에 여색을 가까이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유독 옥경아를 귀여워한다면서 특별히 술잔을 들어 직접 주기도 했다.”
이 대목을 두고 정창권은 ‘기녀 옥경아와의 사랑’이란 제목의 절을 별도로 만들어 8쪽에 걸쳐서 미암과 옥경아의 만남, 그리고 기생과의 잔치 모습을 그려냈다. 사료에 한 줄만 나오는 ‘장금’이나 ‘공길’을 드라마 ‘대장금’과 영화 ‘왕의 남자’로 변신시킨 일에 비견될 정도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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