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산문집 출간은 정 씨의 열렬한 추천으로 이뤄졌다. 대학 시절 문학 서클에서 함께 활동해 아내의 글 솜씨를 익히 아는 정 씨가, 아내에게 모아 놓은 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책을 내자고 제안한 것.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일상보다 감성이 우선인 시인 남편과의 45년 결혼 생활이 빚어낸 에피소드다. 40여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쌀독이 텅텅 비었다고 아내가 얘기하자 남편은 원고료 받을 게 있다며 쌀을 사 오겠다고 나갔다. 그러나 오전 2시 술에 잔뜩 취해 장미꽃 한 다발과 귤 한 봉지를 들고 귀가한 가장. “쌀은?” 이 말부터 하며 가방을 빼앗아 열어 보니 책만 가득했다.
20년째 남편이 만들어 온 현대시학은 아내에겐 때론 시앗 같은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남편이 피를 말리며 현대시학을 만드는 걸 일부러 외면했다. 그의 세계는 너무 깊고 요원해서 들어갈 수가 없다. 그동안 현대시학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진저리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함께해 온 아내는 “이제는 혼자 싸워 온 늙은 병사 같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고 안쓰러워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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