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책의 부제로 달린 말이다. 당대가 마주친 과제에 대해 지식인의 원대한 뜻과 책략을 묻는 엄중함과 비장감이 배어 있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는 조선시대 과거시험 최종 관문에서 선비들이 왕의 질문인 ‘책문’에 답한 ‘대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결코 단순한 시험 문제와 정답으로 읽히지 않는다. 질문에는 왕의 깊은 고뇌가 들어 있고, 대책에는 피를 토하는 직언과 묵직한 정론이 펄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오랜 전란으로 민중의 삶이 피폐해지고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광해군이 묻는다. “내가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추진하기만 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라가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인가? 폐단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상세히 말해 보라.”
이에 조위한은 고전에 비추어 정치의 원칙을 말하고, 고금의 역사에서 잘잘못의 사례를 들고, 처참한 현실을 낱낱이 밝힌 뒤 방책을 내놓는다. 그런데 대책의 곳곳에서 “전하의 근심거리는 남북의 국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궁궐의 담장 안에 있는 것 같다” 하고, 세금을 줄이라는 임금의 교시가 소용없다면서 “백성을 사랑하겠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겉만 번지르르한 문구에 지나지 않음”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왕의 질문에는 지식을 시험하려는 협량한 의도보다는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자는 대국적 의식이 깔려 있다. 선비의 대책에는 “도끼에 맞아 죽을 각오”로 자신의 뜻을 남김 없이 밝히는 기개가 넘친다. 이렇듯 책문에서는 질문자와 응답자 사이의 상호 인정 없이는 불가능한 대등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 비록 훗날에 폐단이 생기긴 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높은 수준의 민주적 소통 체계가 작동되고 있다. 인터넷 댓글 정치가 민주주의로 위장된 우리 시대의 가벼움을 부끄럽게 만든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책문은 현대가 항상 우월하다는 우리의 선입관을 깨는 통시성이 있다.
그뿐 아니라 책문에는 실천적인 인문 정신이 살아 있다. 정치, 외교, 국방, 행정, 인사, 교육, 문화 등 사회 전 영역을 포괄하는 주제가 제시되고, 역사와 철학과 문학의 고전을 경계 없이 넘나드는 정론이 있다. 그렇다고 책문은 박학다식한 지식을 보여 주는 체계는 결코 아니다. 주체적인 한 인격이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문제의식을 치열한 언어로 토해낸 작품들이다. 여기서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실천적 지식인’과 비견되는 동양적 이상으로서 ‘전인적 지식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홍문국 논술이데아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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