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으로 내려와 산 지 6년이나 됐다.
오지의 숲 속에 자리한 산중 처소가 내뜻과 상관없이 점점 공개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도 세월이 흐르는구나 하고 느낀다.
어제도 휴가 중인 낯선 손님이 찾아와서 내가 우려내 주는 차를 마시면서 이것저것 묻고 갔다.
도회지 사람들이 궁금하여 묻는 말 중에 하나는 “산중생활을 해 보니 어떻습니까?” 이다.
나는 그들에게 자연이 내 스승이 된 느낌이라고 대답하기 일쑤인데, 좀 추상적이어서 자신이 먼저 머쓱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나로서는 정답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아서 같은 말을 반복하곤 한다.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서 혹은 밭농사를 지으면서 아하! 하고 무릎을 칠 때가 많다.
자연에서 물고기처럼 싱싱한 지혜와 나만의 지식을 얻기 때문이다.
초여름의 길목에 들어선 요즘에는 상사화와 복수초의 잎들이 자취를 감추어 구경할 수 없다.
그렇다고 녀석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사화는 올여름에 꽃등처럼 켜지는 붉은 꽃을 피우고자 휴가를 보내고 있고, 복수초는 올겨울에 필 노란 꽃을 위해 더 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셈이다.
자신의 생애에서 절정(絶頂)을 이루기 위해 뿌리에 힘을 비축하고 있는 중이다.
휴가 중에 맞이하는 우리들의 휴식도 이래야 한다. 저잣거리의 속도에 휘말린 자기 자신도 알맹이가 부실해진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제대로 들어섰는지 찬찬히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래서 자연이건 사람이건 간에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휴식은 인생을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는 쉼표이거나 순접(順接)의 부사와 같아야 한다.
자연의 모든 식구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쉴 줄 안다. 생존을 위해서도 쉬는 것을 지킨다.
사철 내내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록수도 겨울에는 활엽수처럼 쉰다. 늦가을이 되면 다음 해의 성장을 위해 수액을 뿌리로 내린 뒤 쉬는데, 그렇지 않고 수액이 가지에 남아 있으면 얼어 죽고 만다. 나무도 잘살기 위해 가지를 비우고 시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것을 잘사는 비결이라고 착각한다. 일만 죽어라고 하는 사람을 사회가 존경스럽다고 부추기기도 한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런다지만 결국에는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온갖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조차 안타깝게도 휴(休)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심지어 정신없이 노는 것과 쉬는 것을 혼동하기도 한다. 휴는 사람(人)과 나무(木)가 결합된 글자인데, 사람이 자연을 찾아가 쉰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속뜻은 자연 앞에서 세상 살아가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도 있다. 노자가 말한 식영(息影)이란 휴보다 더 적극적이다.
숲속에 들어가면 사람의 그림자마저 쉬게 된다는 의미가 식영이고 보면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적으로 치닫는 것들에서 떠나 자연을 스승 삼아 안식을 얻으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이다.
산도 자연이요, 바다도 자연이다. 사람들이 어디에 있건 자연을 벗 삼고 스승 삼아, 상사화가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에 힘을 모으는 것처럼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휴가의 시간도 그리 됐으면 좋겠다.
휴가가 심신의 힘을 빼는 노는 문화로 전락하기보다는 심신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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