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8>칼의 노래

  • 입력 2006년 7월 10일 03시 06분


《사실 나는 무인된 자의 마지막 사치로서, 나의 생애에서 이기고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나는 다만 무력할 수 있는 무인이기를 바랐다. 바다에서, 나의 무(武)의 위치는 적의 위치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사치는 성립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는 늘 머물 곳 없었고, 내가 몸 둘 곳 없어 뒤채는 밤에도 내 고단한 함대는 곤히 잠들었다.―본문 중에서》

‘칼의 노래’는 충무공 이순신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책은 스토리로 읽는 소설은 아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난중일기’를 중심으로 한 기록과 사실에 입각한 역사이되,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이 아닌 이순신의 내면에 투영된 역사다. 이순신의 내면은 김훈이라는 작가가 읽은 내면이다. 이 책이 읽는 사람마다 달리 비치는 것은 사람마다 마음속 거울이 제각각이기 때문일 터이다.

소설은 백의종군 무렵부터 퇴각하는 적의 전면에 육신을 내던져 전사하기까지 이순신의 삶과 임진왜란 당시의 사건들이 서사의 뼈대를 이루는 가운데, ‘난중일기’ ‘함경도일기’ ‘임진장초’ ‘서간첩’ 등 관련 서지를 토대로 하여 이순신과 그의 시대를 핍진(逼眞)하게 서술한다. 왜적의 행보와 그에 응전하는 임금과 신하, 백성과 군대의 생생한 묘사는 역사의 박진한 내용과 과정을 보여 준다.

작가는 한국사에서 거의 유일한 무오류의 영웅인 이순신의 드러나 있는 궤적을 실증적으로 복원하되, 신화로 남은 자의 내면의 전투까지 형상화한다. 철저히 이순신의 1인칭 서술로 일관된 시점을 통해 정치와 권력, 의무와 실존, 풍경과 무기, 밥과 몸에 대한 사유들이 그려진다. 그것들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소설 속 이순신의 아우라는 순결한 영혼이자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다.

허무주의자로 불리는 작가 김훈 씨의 많은 글이 그러하듯 이 소설은 세상의 진실을 보아버린 자의 허망함으로 가득하다. 작가는 허망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파악한다. 작가가 붙잡는 진실은 허망하기에 아름답다.

소설은 이순신이라는 고독한 인간이 “희망은 없거나, 있다면 오직 죽음 속에 있을 것만 같다”는, 칼로 벨 수 없는 세상의 ‘무내용’과 싸우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쓰고 있다. 그 속에서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만은 없다는 생명의 운명이 맞부닥친다. 작가가 그린 이순신의 지옥은 너무나 아름답다.

이 책은 또한 문체를 읽어야 한다. 작가의 글은 미시적(微視的)이다. 작가는 대상에 내시경을 들이밀어 눈에 보이는 풍경의 무늬와 질감을 그려낸다. 그려내되, 손에 잡히듯 눈에 보이듯 귀에 들리듯, 감각화하고 시각화하고 청각화한다.

‘칼의 노래’라고 제목을 붙였듯 이 책을 음악으로 받아들인다면 주옥같은 아리아로 시종일관하는 장엄한 오페라다. 그림으로 본다면 명화(名畵)다. 명화이되 3차원의 명화다. 셋째 아들인 이면의 죽음을 쓴 ‘젖냄새’ 장(章)은 그중 압권이다. 면의 칼싸움은 ‘면은 칼을 놓치고 제 피 위에 쓰러졌다. 스물 한 살이었고, 혼인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적의 칼이 면의 오른쪽 어깨를 갈라 내릴 때 피는 독자의 어깨에서도 솟구친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 일컬어지는 이 소설은 독자인 내게도 축복이다. 나는 요즘 ‘칼의 노래’를 열 번째 읽으면서 그의 다음 소설들을 기다리고 있다.

김순응 K옥션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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