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사청탁은 떳떳한 공무?…‘유서필지’에 모범예문 실려

  • 입력 2006년 7월 1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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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이 아전의 직임을 수행한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아직도 중요한 직임에 뽑히지 못한 이유는 실로 제가 못난 탓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감히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겠습니까. … 삼가 특별히 하해와 같은 은택으로 수령에게 편지로 부탁해 주셔서 이번 직임을 바꿀 때 좋은 자리에 뽑힐 수 있도록 해주소서. 천만번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너의 일에 대해 비록 자세하게 말한 적은 없었으나, 어찌 소홀히 하였겠느냐. 이미 전에 부탁해 뒀지만, 실효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마 직임이 바뀔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다음번 회답을 기다려 보아라.”

인사철마다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불우한 천재’들에게 이 편지는 어떻게 읽힐까. 부끄럼을 모르는 인사 청탁의 편지이고, 노련한 상사가 적당히 둘러대는 답장이 아니겠는가.》

○ ‘유서필지’ 인사청탁 등 7가지 양식 소개

놀랍게도 이 글들은 조선시대 하급관리의 공문서 스타일북인 ‘유서필지(儒胥必知·유학자와 서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뜻)’에 당당하게 실린 모범 예문이다.

철종 연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에는 크게 7가지 양식의 서류가 실려 있다. 국왕에게 직접 청원하는 상언(上言), 국왕이 거동할 때 징이나 북을 치며 올리는 격쟁원정(擊錚原情), 지방 수령에게 탄원하거나 청원할 때 작성하는 소지(所志), 제물을 봉송하거나 상가에 부의할 때 작성하는 단자(單子), 서리가 수령에게 올리는 보고서인 고목(告目), 거래계약서인 문권(文券), 어떤 사실을 알리는 통문(通文)이다. 앞서 소개한 인사청탁의 서식은 고목 항목에 실려 있다. 한국 사회의 인사 청탁 문화가 조선시대에는 공식문서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헌연구실에서 한글로 번역한 이 책(사계절출판사)을 통해 당시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

소 잡는 것을 국법으로 금했던 조선 후기에는 우황청심환 같은 한약재용으로 소 잡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서류도 나오고, 급전이 필요해 땅을 팔았다가 이를 다시 사려는데 상대가 응하지 않을 때의 소송문서도 담겨 있다.

○ ‘…간찰첩 모음’ 바람맞은 기생편지 등 123통

한국고간찰연구회에서 번역한 ‘조선시대 간찰첩 모음’(다운샘)은 또 다른 측면에서 조선시대의 문헌을 오늘에 되살려냈다.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1914∼1999) 밑에서 한학을 배운 학자들이 중심이 된 고간찰연구회는 1999년부터 매달 한 번씩 모여 옛 편지를 읽으며 초서를 익히는 모임.

2003년 1차 성과물로 ‘옛 문인들의 초서 간찰’을 펴낸 데 이어 이번에 조선시대 유명 인사들의 편지를 모은 간찰첩 6권 123통에 실린 편지글을 탈초(脫草·초서를 정자로 바꾸는 것)하고 번역해 2집을 낸 것.

“삼년 동안 서울에서 헛되이 헤매니/어지러이 나비들이 향기를 시험하는 것 우습네/일 많은 상공께서는 정이 엷어진 듯하고/봄을 아끼는 생각에 잊기 어려워라/비록 이제서 기러기 소식을 전해준다 한들/어찌 거문고도 없이 술잔만 들 수 있으리/내 말은 누렇게 지쳤으니 어찌 떠날 수 있으리오/원컨대 노자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오.”

옥화라는 기생이 장동에 사는 김 판서에게 보낸 편지에 실린 이 한시에서는 당시 세도가였던 장동 김씨 일파를 믿고 상경했다가 바람맞은 채 물러가는 기생의 회한이 담겨 있다.

또 정조가 영상인 채제공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서 ‘즉시 올립니다’(卽拜)라는 존칭을 사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성호 이익이 제자인 안정복에게 준 가르침, 차(茶)를 매개로 이뤄진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담화선사가 나눈 우정 등도 편지글 속에서 새롭게 확인됐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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