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

  • 입력 2006년 7월 15일 03시 00분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다니엘 페나크 지음·김운비 옮김/384쪽·9000원·문학동네

‘추리소설+익살극+가족소설=말로센 시리즈.’

편당 100만 부 이상 팔리는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의 최고 인기 시리즈가 바로 ‘말로센 시리즈’다. 이 책은 말로센 시리즈의 첫 권. 말로센 가족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집을 나갔다가 임신한 채로 돌아와 아이를 낳은 엄마와, 그렇게 태어난 자식들로 구성돼 있다. 책마다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주인공을 맡아 이야기를 펼친다.

‘식인귀…’의 주인공은 말로센 집안의 맏아들 뱅자맹. 백화점에서 일하는 그의 직업은 이런저런 일로 항의하는 고객들에게 비굴하게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구하는 ‘희생양’ 구실을 하는 것. 직장 일도 피곤한데 가족도 바람 잘 날 없다. 철없는 엄마는 생계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첫째 여동생 루나는 매일 오빠한테 전화해서 비슷비슷한 하소연을 늘어놓고,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다. 테레즈는 점성술에만 푹 빠져 있고, 제레미는 세상 모든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대기만 한다. 어쩌다 이런 괴상한 사람들과 한 지붕 아래 살게 됐을까 기막혀 하지만, 한숨을 쉬면서도 서로 어르고 달랜다. 여기까지는 가족소설.

뱅자맹이 일하는 백화점에서 연쇄폭발 사건이 발생한다. 문제는 사건 현장에서 어김없이 뱅자맹의 모습이 잡힌다는 것. 게다가 동생들까지 사건에 얽혀든다. 루나가 만난 낙태반대론자 교수가 세 번째 폭발 희생자가 되고, 테레즈는 점성술로 네 번째 폭발의 시간과 장소를 예견한다. 가족 전체가 범인으로 몰릴 판이다. 위기에 처한 가족들이 진범을 찾아가는 긴박한 구성은 추리소설에 가깝다.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가 읽는 재미를 돋운다. 폭탄으로 내장이 쏟아지고 두 동강 난 시체를 끔찍할 정도로 열심히 묘사하다가 수다스러운 경찰의 입을 통해 죽은 사람의 바지 지퍼가 열려 있음을 알리는 식이다. ‘다니엘 페나크표 소설’을 만드는 개성적인 익살극을 작품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스며 있음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랑스의 극우 정당 국민전선(FN)이 “이민자들이 우리를 파산시킬 것이다!”라고 선동하던 1980년대에 나온 이 소설에는 이민자와 동성애자, 노인 등 소외 계층을 따뜻하게 보듬는 작가의 시선, 인종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라는 주제의식도 담겨 있다. 익살스러운 수다를 정신없이 좇아 읽다가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의외의 묵직함이 느껴진다. 원제 ‘Au Bonheur des Orges’(1985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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