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 101명이 미리 쓴 가상유언장

  • 입력 2006년 7월 25일 1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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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주 어려서 너를 낳아준 네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네게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랑과 행복을 안겨주지 못한 점이 늘 미안했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접시꽃 당신'의 망부가가 새삼 떠오르는 대목이다. 결혼 2년 만에 아내를 잃었던 도종환(52) 시인이 아들에게 보내는 가상유언장의 일부다.

수필가 피천득(96) 옹은 '그랜드 올드 맨(老大家)는 못되더라도 졸리 올드 맨(好好翁)이 되겠다'는 의욕을 보이면서도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어 '사랑을 하고 갔구나'하고 한숨 지어주는 것이 바람'이라고 유언한다. "새해에는 잠을 못자더라도 커피를 마시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도록 노력하겠다…한 젊은 여인의 애인이 되는 것만은 못하더라도 아이들의 할아버지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문인 101명이 미리 쓴 유언장을 묶은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경덕출판사)에는 이렇게 가슴에 와닿는 유언이 적잖다.

이해인(61) 수녀는 "나의 관 위에 꽃 대신 시집 한 권을 올려놓으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한다. "책들은 도서실로 보내면 되고 일기장들은 태우기 아까우면 부분적으로 출판을 하고 그 밖의 자잘구레한 것들과 옷가지들은 태울 건 태우고…" 침착한 성품을 헤아릴 수 있는 부분이다.

소설가 공선옥(42) 씨는 큰딸에게 "나 없으면 이제부터 네가 부모다"라고 엄격하게 말한다. 공 씨는 이어 "114에라도 물어 제일 가까운 화장장으로 가서 화장을 시키고, 집안 청소 깨끗이 하고, 몇 가지 나물과 밥과 국과 물 한 그릇을 엄마를 위해 딱 한번만 차려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한다. "엄마가 죽었다고 절대로 상심하지 말고 잘 먹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소설가 하성란(39) 씨도 딸에게 "엄마 품에 쏙 들어오는 아기로 남아있길 바랐는데,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친구들과 백화점에 갔다 왔다는 얘길 했을 때 조금 쓸쓸했어"라고 애틋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소설가 한말숙(75) 씨는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된다"는 구체적 유언을 남겼다. 그의 남편은 가야금 명인 황병기 씨다. 소설가 전상국(66) 씨는 특별히 자신이 쓴 소설들에게 글을 보냈다. "항상 나보다 앞서 있는 내 독자들을 내가 얼마나 두려워했는가를 너희들이 증언해 주기를 부탁한다."

작고한 문인들이 세상 떠나기 전에 써놓은 글도 눈길을 끈다. 구상 시인은 "오늘에서부터 영원을 살자"고, 이형기 시인은 "무소유 한마디 밖에 쓸 것이 없다"고 유언을 남겼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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