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공산주의 세력은 서울파, 북풍회, 조선노동당, 화요회로 나뉜다. 서울파는 1921년 창립된 서울청년회 내부에서 김사국, 이영 등을 리더로 자생한 사회주의운동세력. 북풍회는 1923년 일본 유학생 김약수 등을 중심으로 설립된 북성회를 모체로 한 사회주의 서클이다.
조선노동당은 1924년 러시아와 일본 등에서 활약한 사회주의운동가들이 국내로 잠입해 결성한 단체다. 화요회는 국제공산당기구인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김재봉이 1923년 조직한 신사상연구회가 그 전신으로, 박헌영, 조봉암, 권오설 등 훗날 공산주의 운동 거물들의 둥지였다는 점에서 학계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전 교수는 이번 책을 통해 이들 단체가 표면 조직과 별도로 지하당 조직을 갖고 있음을 밝혀냈다. 서울청년회는 고려공산동맹, 북풍회는 까엔당, 조선노동당은 스파르타쿠스당을 거느렸고, 화요회는 이르쿠츠크파 계열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는 것.
아울러 그는 조선공산당 설립이 화요회의 기만전술의 산물이었다는 점도 드러냈다. 화요회는 당초 4대 세력의 연합으로 조선공산당을 세우려다 최대 세력인 서울파가 걸림돌이 되자 이를 따돌리고 북풍회와 조선노동당과 손잡고 조선공산당을 세웠다. 화요회는 이 사실을 코민테른에 보고하면서 북풍회와 조선노동당을 다시 제외한 사실이 드러나 ‘3단체 합동’은 그해 10월 결렬됐다.
화요회가 서울파를 배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파가 해외 공산주의세력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동녕 중심의 상해파 조선공산당과 이에 반대하는 이르쿠츠크파 조선공산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서울파는 이를 비판하며 1922년 ‘중립당’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 서울파가 민족주의세력과의 통일전선을 강조한 반면 이르쿠츠크파는 이를 부르주아 세력과의 결탁이라고 비판했던 노선 갈등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사회주의운동은 김일성과 박헌영 같은 스탈린주의로 귀결됐다. 이 책은 사대적이었던 화요회의 주도권 장악과 연계해 이를 재검토할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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