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매혹과 환멸의 20세기 인물이야기’

  • 입력 2006년 7월 29일 03시 10분


◇ 매혹과 환멸의 20세기 인물이야기/이기우 지음/412쪽·2만3000원·황금가지

애플 컴퓨터의 한입 베어 먹은 사과 모양 로고에는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개인에게 가해진 집단의 끔찍한 폭력이 담겨 있다. 현대 컴퓨터의 원형이라 할 튜링 머신을 고안한 영국의 천재수학자 앨런 튜링은 1952년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으라는 ‘주사 형(刑)’을 받는다. 이를 견딜 수 없던 튜링은 사과에 독극물을 주사한 뒤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베어 물었다.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애플사의 로고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한 천재에 대한 경의의 표시다.

20세기가 사진첩이라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스냅 사진들이다. 기자인 저자가 동아일보 ‘책갈피 속의 오늘’에 연재한 163편의 글을 세계 인물편, 세계 사건편, 한국편으로 묶어 펴냈다.

사람과 사건을 통해 시대를 소묘하는 저자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다. 예컨대 화학비료 제조의 원조 격인 암모니아 합성법을 개발하고 소금을 분해해 염소 가스를 만든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를 설명하면서 ‘평화 시에 공기에서 빵을 만들고 전시에는 소금에서 독가스를 만들었다’고 시적으로 묘사한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사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을 읽는 맛이 쏠쏠하다.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는 세기의 러브스토리 주인공이었지만, 사실 그의 결혼은 모나코 경제의 젖줄이나 다름없던 관광산업을 살리기 위한 정략적 계산의 결과였다.

엘리너 루스벨트가 여성 운동과 인권 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남편 루스벨트 대통령의 외도 때문이었다. 엘리너는 남편의 외도를 처음 눈치 챈 연도인 ‘1918’을 숨지기 전 침대 곁에 써 놓을 정도로 죽는 날까지 괴로워했다. 흑인 운동가 맬컴 엑스가 성을 ‘리틀’에서 ‘엑스’로 바꾼 것은 담배를 끊고(ex-smoker) 술을 끊고(ex-drinker) 기독교를 끊고(ex-christian) 노예의 사슬을 끊으려는(ex-slave) 의지의 표현이었다.

라마크리슈나처럼 19세기에 살고 죽었으나 20세기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의 이야기도 함께 실렸다. 역사적 사건, 인물을 다룬 여느 책들과 이 책이 다른 점은 대형 사건과 인물에만 매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편만 보아도 1988년 맥도널드 체인점이 한국 땅에 상륙한 사건이 6·25전쟁 정전협정에 비해 작지 않은 비중을 부여받는다. 사회나 삶의 모습이 대형 사건들로만 채워지지 않듯이 말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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