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25>비명을 찾아서

  • 입력 2006년 7월 31일 03시 05분


《책상 한쪽에 놓인 ‘국어대사전’에 눈길이 머물면서, 차가운 날을 품은 바람이 가슴을 아프게 훑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상으로 받은 사전으로, 스무 해가 넘는 세월 속에서 말을 다듬는 일을 업으로 살아온 그를 인도해 준 책이었다. 사천 면이 넘는 무거운 책이라 가져갈 수는 없었다. 그가 아픔을 느낀 것은 그 책을 가져갈 수 없어서는 물론 아니었다. 이젠 국어와 작별해야만 했다. (…) 불혹의 나이를 바라보는 시인에게 그것은 넋의 한 덩이를 떼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본문 중에서》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원칙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 있으니, 대체역사라는 기법으로 쓰인 환상적 소설의 세계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얼마든지 실제 역사와 다른 가정을 도입하는 것이 허용되며, 그러한 전제 위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가 구축된다.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필립 K 딕과 같은 과학소설의 대가들이 사용한 대체역사의 기법을 한국 문학에 처음으로 도입한 작품이다. 본래 환상적 문학의 전통이 취약한 데다 특히 현실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리얼리즘론의 영향력이 압도적이던 1980년대 후반 한국 문학의 상황에서, 복거일의 등장은 파격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비명을 찾아서’의 파격성은 새로운 기법의 도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역사적 가정의 내용이었다. 만일 한국이 만주 벌판을 호령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식의 상황 설정이었다면 이 소설은 민족주의적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통속적 역사 판타지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복거일은 일반적인 민족주의적 정서에 거역하는 위험스럽고 도발적인 상상을 시도했다. 그의 가정에 따르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협력함으로써 전후에도 조선을 계속 식민지로 두게 된다. 일본의 적극적 동화정책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조선인들은 스스로 일본인이라 믿으며 조선 땅에서 조선어와 조선어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추방되었다. 국제정세의 우연한 변수에 따라 조선인이 일본의 노예 같은 존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자학적이고 모멸적인 상상은 매우 충격적이다.

작가는 황당무계해 보이는 상상의 세계를 일본 근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설득력 있고 세밀하게 그려 냈고, 식민지에 대한 강압 통치가 결국 일본 전체의 정치·경제적 낙후성으로 귀결된다는 설정을 통해 기만적인 동화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분명히 했다. 또 일본 문학과 문화에 빠져들었던 조선의 시인 기노시다 히데요가 차별과 피해, 열등의식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민족의식의 각성에 도달해 망명길에 오르는 것으로 결말을 맺음으로써 악몽 같은 현실에 한 줄기 빛을 던져 주려 했다. 이를 통해 복거일은 독자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설정에서 출발하면서도, 흥미롭게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비명을 찾아서’가 출간된 지 2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수많은 독자를 매혹하는 것은 아마도 이처럼 도발적이면서도 위안을 주는 작품의 양면성 때문일 것이다.

히데요는 굴욕적인 적응과 가망 없는 망명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작가는 주인공이 길을 떠나는 데서 소설을 끝내면서 독자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이라면 어떤 길을 가겠는가?

김태환 덕성여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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