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초대 국무총리는?
광복군 출신의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1900∼1972) 장군이다.
문제의 난도를 조금 더 높여서, 첫 국무총리 후보자는?
1948년 7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이북 출신 목사인 이윤영(李允榮) 의원을 총리 후보자로 지명해 국회에 인준을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통일을 위한 인선”이라고 강조했지만 당시 국회와 언론에서는 “상식 밖의 인선”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 대통령이 국회에서 직접 읽은 ‘총리 임명에 관한 교서(敎書)’를 보면 왜 ‘상식 밖’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추천 명록(名錄)과 신문과 여론상에 발표되는 것을 보면 총리 적임자는 김성수(金性洙)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씨 등이다.”
이 대통령은 스스로 인정한 이런 상식적인 총리 후보들을 배제한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김성수는 ‘앞으로 총리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책임을 맡기려고’ △신익희는 ‘국회부의장의 책임을 계속해야 하니까’ △조소앙은 ‘최근 (정치) 노선이 달라져서’ 등등.
이 총리 후보자 인준안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됐다.
나흘 뒤인 7월 31일.
이 대통령은 이 장군을 새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뒤늦게 “여론상 이범석 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나는 민의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이 장군에 대한 인준안은 8월 2일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통과됐다.
가결 직후 이 대통령은 “장관 인선은 총리와 협의해 인격본위(人格本位)로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요즘으로 치면 ‘총리의 국무위원에 대한 임명 제청권을 보장하겠다’는 것.
그러나 이 장군에 따르면 이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 장군은 조각 과정에서 인준 당시 결정적 도움을 준 한국민주당의 인사를 여럿 추천했는데 그때마다 돌아온 이 대통령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그 자리는 내가 벌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는데….”
“(당신이 추천한) 그 사람 언제부터 알고 있어?”
“왜 하필 그 사람인가.”
‘코드 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과 3명의 총리(35대 고건, 36대 이해찬, 37대 한명숙)가 조각이나 개각 때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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