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발음해 본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간첩은 한때, 그러니까 지금의 20, 30대가 어렸던 시절까지만 해도 입에 담는 순간 공연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단어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마치 그룹사운드라는 말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게 쇠락해 갔다. 대남공작원 내지 스파이란 말이 대신 쓰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 21세기와는 왠지 안 어울린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에서 간첩은 요컨대 몸 어딘가에 잠복해 있는 병원체와도 같다. 소설가 김영하는 새 장편 ‘빛의 제국’에서 그것을 느닷없는 ‘두통’과 연결한다.
‘빛의 제국’은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대한민국의 한 가정이 아침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양외국어대 영어과 출신인 주인공 김기영은 1984년 남파된 이후 여느 386세대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영화수입업에 종사하며 남파된 스파이들의 ‘포스트’ 역할을 해 온 그이지만,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치며 ‘히레사케와 초밥, 하이네켄 맥주와 샘 페킨파나 빔 벤더스의 영화를 좋아’하고 ‘일요일 오전엔 해물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엔 홍익대 앞 바에서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과 별다를 게 없는 인물이 되어 간다. 이른바 특별할 것도 위험할 것도 없는 ‘보편적인 한 인간’이다.
어느 날 아침 그는 난생처음으로 두통을 앓는다. 그건 일종의 예감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한다. 김기영은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는 북의 지령을 받는다.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소설은 그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하루는 여느 ‘보편적 인간’의 하루와는 사뭇 다른 듯싶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간첩이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김영하는 두통으로 시작된 하루 속에 김기영이라는 한 인물의 20년과 분단 이후 한반도의 60년을 특유의 빠른 문장으로 단번에 우려낸다. 그러면서 김기영이라는 특수한 인물, 한반도라는 특별한 정치적 역사적 정황을 넘어 모든 인간이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빛과 어둠의 불균등한 상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 ‘빛의 제국’은 벨기에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연작에서 따왔다. 이른바 ‘혼자만 어둠 속인 혹은 혼자만 대낮인, 그런 세상’을 살아온 김기영의 실존을 환기하는 셈이다. 392쪽의 두꺼운 분량이지만 첫 장을 펼친 이후 마지막까지 한달음이다. 내 경우엔 넉넉히 세 시간 반이 걸렸다. 그리고 불현듯 두통이 찾아왔다. 말인즉슨 ‘정신적 잠’이 확 깨인 것인데, 도대체 누가 내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환 명령을 내릴지 불안해지면서 주변 사물들이 낯설어진다. 소설을 다 읽고 마주한 이른 새벽의 빛 속으로 망명하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김기영과는 다르게 만성적인 편두통 환자이건만, 이런 두통은 짐짓 생면부지다.
강 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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