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서구에서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한 근대화와 민주화를 불과 한두 세대 만에 이뤄냈다. 그런 과거사를 비판과 부정의 대상으로 삼는 지식인들의 집요함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공동대표를 지낸 권태준(정책학)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는 영국의 극작가 존 오스본의 희곡 ‘성난 얼굴로 뒤돌아보라’에 비유한 이 화두를 갖고 600여 쪽의 방대한 저술을 펴냈다. 그는 근작 ‘한국의 세기 뛰어넘기’(나남출판)에서 한국의 건국과 근대화, 민주화 과정을 서구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지식인들의 인식을 비판하면서 이를 한국적 맥락에서 차분히 분석했다.
17일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만난 권 교수는 “2002년 8월 정년퇴임한 날부터 꼬박 4년을 집필에 쏟아 부었다”며 “누군가가 한국 지식인의 시대착오성을 일깨워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식인의 시대착오성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권 교수는 “과거 자유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당시 대중에게 난해한 외래 개념과 이론을 너무 앞서 수입한 데 비해 현재는 세계화라는 세계시간대에 본능적으로 적응하는 대중보다도 뒤져 있다”며 “이는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에 따라 그 구별이 모호해진 이념투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지식인이 비판과 부정의 대상으로 삼은 과거의 유산이야말로 4800만 국민 대부분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며,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지식인들의 과거비판은 ‘풀뿌리 민중’과 유리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지식인들이 개인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초개인적 위치에서, 시민의 일상적 삶의 세계를 초월한 고담준론을 펴는 도덕적 감시자 구실을 자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이중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권 교수는 근대화를 발전국가론과 식민지근대화론 등 서구 이론의 틀에서 바라보는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한국의 자본주의는 서구 자본주의 성립 이전의 중상(重商)주의를 20세기 세계시장논리와 타협한 ‘의제(擬制) 자본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화 역시 개인화나 계급화라는 서구적 기준의 여건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서구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세계화의 물결은 세계 각국에 저마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독자적 방식의 적응을 모색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지식인들은 이를 외면한 채 철지난 이념투쟁에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사 청산 같은 거대 쟁점에 대해 거대담론으로 시비를 가리려는 근본주의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열정이 아니라 ‘풀뿌리 민중’의 일상 문제를 차분히 풀어 갈 실용주의적 자세”라고 강조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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