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골에 화해의 씨앗 뿌리고 가다… 강원용 목사 소천

  • 입력 2006년 8월 18일 03시 09분


동아일보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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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후 7시경 강원용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추모 기도를 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이날 오전에도 강 목사가 별세하기 직전 찾아와 묵상기도를 바쳤다. 신원건  기자
17일 오후 7시경 강원용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김수환 추기경이 추모 기도를 하고 있다. 김 추기경은 이날 오전에도 강 목사가 별세하기 직전 찾아와 묵상기도를 바쳤다. 신원건 기자
“‘당신은 정치가요?’ ‘아니요’, ‘당신은 사회운동가요?’ ‘아니요’, ‘당신은 성직자요?’ ‘아니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요’….”

17일 타계한 여해 강원용(如海 姜元龍) 목사는 자서전 ‘빈들에서’를 통해 스스로를 정치인도, 사회운동가도, 성직자도 아니라고 했으나 사실 그는 그 모두였다.

그는 목사로서 경동교회를 창립하고 교회 개혁을 이끌었으며,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통해 지속적인 사회운동을 펼쳐나갔다. 유신정부와 대립해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지만 군사정권시절 현실정치에도 참여해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아프리카에서는 노인 한 명이 세상을 떠나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는데 고인의 죽음은 마치 교회사, 정치사, 지성사를 통틀어 한국 근대사를 다룬 역사책 한 권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라며 애도를 표했다.

함경도 시골에서 가난한 화전민의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5세 때 세례를 받았다. 광복 직후 고인은 김규식 여운형과의 만남을 통해 청년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그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자는 의미에서 ‘선린형제단’을 조직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장로회의 그루터기가 된 경동교회의 모태가 됐다.

32세 때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미국으로 유학해 뉴욕 유니언 신학대와 대학원을 마치고 1957년 귀국했다. 이후 1986년 경동교회 당회장직을 물러날 때까지 줄곧 경동교회를 이끌었다.

그를 이야기할 때 ‘크리스챤 아카데미(현 대화문화아카데미)’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1965년 ‘모든 사회문제를 연구하고 대화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한다’는 목표 아래 그가 주도해 설립했다.

이후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노동, 여성, 청년, 교회 등 각계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이끄는 많은 리더들이 이 교육 프로그램을 거쳐 갔고, 그의 튼튼한 인맥이 됐다.

1979년 중앙정보부는 ‘이적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비밀서클’이라며 아카데미 간사들과 학습모임 참석자들을 구속 기소했다.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이었다. 당시 간사였던 신인령 전 이화여대 총장을 비롯해 장상환 경상대 교수,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이 끌려가 고문당했고 고인 역시 끌려가 닷새 동안 고초를 겪었다.

대화모임은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설립된 첫 해부터 시작한 사업이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 한명숙 총리,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총재, 신낙균 전 문화관광부 장관, 문용린 전 교육부 장관,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김경동 서울대 명예교수 등도 대화모임과 각종 세미나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이런 폭넓은 인맥을 토대로 그는 종교계를 넘어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방송윤리위원장, 방송위원장, 방송개혁위원장을 지내는 등 방송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추구했던 삶은 ‘중간(Between)’과 ‘넘어(Beyond)’로 요약된다. 그는 “양극으로 대립되는 상황에서 중간지대에 서는 게 아니라 중간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게 바르게 사는 길”이라고 말했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통해 ‘중간집단’을 양성하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스스로를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화해자’로 자처했다.

‘중간’은 ‘회색지대’로 비치기 십상이다. 특히 군사정권 시절, 그의 행보는 원칙주의자들로부터 현실의 극복이 아닌, ‘현실 타협’이란 비판을 받았다. 5공 시절 민정당 국정자문위원 직을 맡았을 때는 ‘투항자’ ‘변절자’라는 말도 들었다. 6공 시절에는 총리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려 ‘세속적인 관심’이 지나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1965년 ‘6대 종교 간 대화’를 시작으로 타 종교와의 대화에 노력한 것은 종교인으로서의 업적으로 꼽힌다. 말년의 관심사는 통일문제였다. 2000년 ‘평화포럼’을 만든 뒤 타계 전까지 매일 사무실로 출근하며 남북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는 자서전 등을 통해 ‘삶의 맺음말’을 미리 썼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내게도 하나님이 오라고 하시는 시간이 닥칠 것이다. 허물투성이인 부끄러운 삶이지만, 나의 허물보다 훨씬 큰 사랑을 믿고, 오라는 때 조용히 갈 것이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金추기경 “우리는 대화가 잘됐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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