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에 꼭꼭 감춰둔 작가들의 연애편지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시인 소설가 27명이 내놓은 편지를 묶은 ‘작가들의 연애편지’(생각의나무)에서다.
소설가 하성란 씨가 200×년 H 씨에게 보낸 편지. “열정과 정염이라는 단어가 겸연쩍어 속에 담고 있기에 너무도 불편합니다. 장난이라니요, 제가 왜 H 씨를 상대로 장난을 하겠습니까.” 짝사랑하는 (게다가 엄마를 닮은 아이들이 있다는 것으로 봐서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사랑의 태풍에 휘말린 것 같은 마음을 털어놓는 내용이다. 문장 하나하나에 사모하는 사람이 자신을 봐주길 바라는 간절한 심정이 담겼다.
시인 이승하 씨는 결혼식날을 회상하는 것으로 아내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시작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때 저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아내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서운하게 들릴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 씨는 친정 부모의 뜻을 거스르면서 시인에다 몸도 허약한 남자와 결혼해 열심히 살아온 아내에게 “그대의 사랑으로 나는 결혼한 그날 이후 지금까지 행복하였소”라고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못내 수줍었던지, ‘이인칭인지 삼인칭인지 모를 너’라고 모호하게 대상을 지칭한 소설가 김훈 씨. “그 여름에 당신의 소매 없는 블라우스 아래로 흰 팔이 드러났고 푸른 정맥 한 줄기가 살갗 위를 흐르고 있었다”고 연정을 품은 대상의 몸을 추억한다. 미문가답게 여인의 몸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문장에서 연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서영은 씨가 공개한 소설가 김동리의 연애편지는 독특한 형식이다. 병든 아내가 있는 ‘식’과, 그 ‘식’을 사랑하는 ‘영’이 등장해 사랑의 줄다리기를 한다. 김동리와 서영은 씨의 연애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얘기다.
이 책은 소설가 김다은 씨가 기획해 월간지에 2년여 연재했던 것이다. 처음 석 달은 한 통도 구하지 못하기도 했고, 승낙했다가 마감 하루 전에 안 되겠다고 통보한 작가도, 편지를 줬다가 취소한 작가도 있었다. 어렵사리 나온 책인 만큼 귀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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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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