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보면 모두 진실한데도, 그런 진실된 인간들이 모이면 어째서 이런 기묘한 일들이 일어나는 건지.”
여름 막바지 으스스한 이야기 선물이 왔다. 보낸 사람은 아사다 지로. 영화화된 소설 ‘철도원’ ‘파이란’ 등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다.
‘사고루 기담’은 어느 날 밤 도쿄 한 빌딩의 펜트하우스에서 열린 비밀 이야기 모임 ‘사고루(沙高樓·모래로 지은 누각)’에서 나온 다섯 편의 이야기를 모은 것. 모임의 멤버는 저마다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 이들은 명예와 목숨을 위해 마음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던 얘기를 털어놓는다. ‘이야기를 들으신 분은 꿈에서라도 발설하면 안 된다’는 게 모임의 규칙이다.
‘백 년의 정원’은 가드닝(gardening)의 여왕 오토와 다에코 대신 참석한 노파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기후도 풍토도 좋지 않은 땅이지만 여자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자 한다. 100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여자는 한번도 정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연의 종으로 봉사한다. 그동안 짝사랑했던 주인의 아들 구니다카도, 불화를 겪던 구니다카의 첫 아내도 자취를 감췄다. 구니다카의 두 번째 아내로 미모의 정원사인 오토와 다에코도 홀연 사라졌다. 정원지기 여자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정원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미들이 있지요. 오토와의 꽃은 마틸다, 구니다카 님은 샤포 드 나폴레옹, 전 부인은 하이브리드 티.” 이들은 과연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엑스트라 신베에’에는 시공을 초월한 무사의 영혼이 등장한다. 막부 말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 촬영장에 무사가 나타난다. 엑스트라 중 하나려니 했는데, 분장도 의상도 완벽한 옛것이고 말투도 고풍스럽다. 자신이 ‘다치바나 신베에’라고 하는데 그런 이름의 배역은 대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
이렇게 읽다 보면 서늘해지는 얘기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따뜻한 인간미가 장기인 작가답게 이야기에는 기묘하면서도 은근한 감동이 있다. 그래서 제목의 ‘기담’도 ‘기이할 기(奇)’가 아니라 ‘아름다울 기(綺)’를 썼다. 원제 ‘沙高樓綺譚’(2002년).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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