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도를 넘는 무더위에,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끈적임이 느껴지던 25일 오후,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에어컨을 켤 수 없다”는 밀양연극촌 소극장 안은 후텁지근했다. 무의식적으로 연신 손부채질을 해대다가 뜨거운 무대 조명 아래 겨울옷을 입은 채 땀 흘리는 배우들의 모습에 슬그머니 손이 내려갔다.
“당신들 누구요?”
“남원 구례 곡성 일대에서 억척이네라면 모르는 사람 없는디.”
“신분증이나 내놔!”
“내가 이 고개 쪼까 넘을라고 헌디, 총탄이 나를 막겄는가 사상이 나를 막겄는가, 밥이 있어야 사상이고 지랄이고 있제….”
브레히트 작품인 줄 모르고 봤다면 창작극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시종 남원 사투리로 진행되는 이윤택 연출의 ‘억척어멈…’은 완전히 우리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다. 17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펼쳐진 30년 전쟁의 이야기는 3년간의 6·25전쟁으로 무대를 옮겼고 원작에 등장하는 독일 민요는 판소리로, 독일 시골 방언은 남원 사투리로 바뀌었다.
이 씨는 “나도 작가지만 우리 희곡의 문제는 역사가 강조되면 개인이 약해지고 개인이 강조되면 역사는 묻힌다는 점”이라며 “역사와 개인을 다룬 작품 중 이만 한 작품이 없다”고 말했다.
‘억척어멈…’은 생필품이 담긴 달구지를 끌고 다니며 병사들에게 물건을 팔아 먹고사는 억척어멈 이야기다. 억척어멈은 혼란의 세월 속에서 군인이 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고 벙어리 막내딸의 죽음을 맞는다.
이 씨는 “아비 부재 내지는 아비의 불구성이 두드러지는 한국 근대사에서 가정을 지킨 것은 ‘억척어멈’ 같은 어머니였다”며 “‘억척어멈’으로 상징되는 어머니는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없는 배우’는 바로 크고 무거운 달구지. 자식들을 차례로 잃고도 억척어멈은 결국 또다시 힘겹게 달구지를 끈다. 버거운 달구지는 결국 우리네 삶의 무게다. “여보시오. 나 쪼께 데꾸 가랑께. 나도 간다고.”
몇 푼과 함께 딸의 장례도 남의 손에 맡긴 채 억척어멈이 서둘러 군대를 따라 나서는 마지막 장면으로 연극은 끝났다. 억척어멈과 더불어 3년간 혹독했던 그때 그 시절을 체험한 것 같았다.
가볍고 달콤한 사랑 이야기만 넘쳐나는 대학로 소극장. 하지만 삶은 결코 그렇게 만만치 않다. 인생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번쯤 봐야 하는 이유다.
원제는 ‘Mutter Courage Und Iihre Kinder’. 9월5일∼10월 1일. 화∼금 오후 8시, 토 오후 4시 8시, 일 공휴일 오후 4시. 1만5000∼2만 원. 대학로 게릴라극장 02-763-1268
밀양=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또 다른 ‘억척어멈’ ‘그래도 지구는 돈다’ ‘서푼짜리 오페라’
여기서도 저기서도 브레히트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서거 50주기를 맞아 브레히트의 주요 작품들이 줄줄이 무대에 오른다. 이달 14일로 브레히트 사후 50년이 지나면서 저작권 문제도 걸릴 것이 없다는 점도 브레히트 작품이 올 하반기 많이 공연되는 이유다.
이윤택 연출의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이 다음 달 초 첫 테이프를 끊는 것을 시작으로 10월에는 똑같은 작품을 40대 연출가인 김광보가 ‘억척어멈’이라는 제목으로 서강대 메리홀에서 선보인다. 같은 작품을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빛깔로 빚어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듯.
‘억척어멈’과 함께 브레히트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갈릴레이의 생애’도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제목으로 다음 달 15일부터 한 달 동안 서울 대학로 사다리아트센터 네모극장에서 공연된다. 극단 인혁의 이기도 연출이 서울시극단과 함께 올리는 무대.
서울 예술의전당은 11월 15일∼12월 3일 토월극장에서 ‘서푼짜리 오페라’를 선보인다. 토월전통연극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
한편 총 6권으로 된 브레히트전집도 조만간 출간된다. 한국브레히트학회 주최로 ‘브레히트 서거 50주기 기념 심포지엄’(11월 3, 4일)과 ‘브레히트 생애와 문학세계’를 주제로 한 자료전(11월 3∼11일)이 성균관대 성균갤러리에서 열린다.
강수진 기자 sjkang@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