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
피고인 김부남 씨는 그해 1월 30일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자신의 고향집 근처에 살고 있던 송모 씨를 찾아갔다. 56세의 송 씨를 미리 준비해 간 과도로 살해했다. 여인은 넋을 잃은 채 이튿날 아침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홉 살 소녀가 서른 살 여인이 될 때까지 20여 년을 하루같이 괴롭히던 악몽의 고리를 끊은 것이다.
소녀는 물을 길으러 가고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심부름 하나 해 달라며 소녀에게 자기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소녀는 시키는 대로 했고 따라 들어온 아저씨는 ‘짐승’이 됐다.
그날 이후 소녀는 말을 잃고 먼산바라기가 됐다. 엄마조차 사정을 몰랐다. 소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튼 한은 병이 됐다.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병은 소녀의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1983년 결혼했으나 남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파탄 났다. 1987년 재혼했지만 역시 순탄치 못했다. 결국 20여 년을 자란 한이 복수의 칼을 들었다.
검사는 이 기구한 여인에게 살인죄의 최저 형량인 징역 5년을 구형했다. 여성계는 ‘20여 년간 유예됐던 정당방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8월 30일 선고공판.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후회하지 않는’ 피고인에게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치료감호처분 3년’이 선고됐다. 살인에 대한 죄를 묻긴 했으되 사실상 무죄로 판결한 것이다. 여인은 1993년 5월 치료감호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성폭력 범죄를 처벌할 특별법의 필요성을 절감케 했다. 1994년 법이 제정됐으나 성범죄는 좀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고, 전자팔찌에 화학적 거세까지 거론하지만 범죄는 날로 극악무도해지는 듯하다.
올 2월에도 서울 용산구에서는 신발가게 ‘아저씨’가 열한 살 소녀를 ‘호떡 먹고 가라’며 꾀어 추행하려다 소녀가 극구 저항하자 살해하고 자신의 아들과 함께 시신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으니…. 그제는 한 청소년 단체의 간부가 10대 청소년 150여 명을 강제 추행한 혐의로 구속됐다.
인두겁을 쓴 ‘짐승’들의 마수(魔手)를 막을 방법은 정녕 없는가.
여규병 기자 3spring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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