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경북 고령 대창양로원에서 살고 있는 김동선(85·사진) 옹이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당사자다.
5남 중 넷째였던 김 옹은 스물 두 살이던 1943년 홀어머니와 동생을 뒤로하고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이미 형 셋이 강제 동원으로 끌려간 터라 홀어머니가 울면서 그를 붙잡았지만 허사였다. 2년 기한의 사할린행이 어머니와의 영영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 옹은 브이코프 탄광에서 채탄 작업에 동원됐다.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도 힘겨웠지만 무너진 흙더미에 파묻혀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겪는 죽음의 공포가 더 컸다.
그는 “일본인들이 자기네 직원과 가족들은 기차며 배에 태워 다 보내면서 ‘조선인들은 나중에’라고만 하고 줄행랑을 놓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소련이 출국금지 조치를 내린 후 김 옹의 기나긴 이방인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언 땅을 갈아 농사도 지어 봤지만 ‘무국적자’로 러시아인들의 멸시를 견디기에 급급했다.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은 곧 실패로 끝났고 ‘검은 대륙’에서의 50년을 그는 거의 혼자 지냈다.
김 옹은 1994년 영주 귀국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몰랐던 동생(82)도 만났다. 그러나 고향에 돌아온 기쁨도 잠시. 김 옹은 그렇게 애타게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1988년경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복은 1945년에 됐지만 내겐 한국에 온 때가 ‘해방’이었지. 그러나 그럼 뭐 하나. 그렇게 오래 사셨는데 결국 아들도 못 보고 돌아가신 어머님께 그저 불효자식일 뿐이지.”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지난해 ‘사할린동포 영주귀국 및 정착지원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며 “오랫동안 정부의 외면 속에 설움을 겪은 이들에게 보상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고령=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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