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 강우규 의사가 1920년 11월 1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강 의사는 1855년 6월 2일 평남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30세 때 한의술을 배웠고 기독교도가 된 뒤 청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 그는 만주로 건너갔다. 지린(吉林) 성 라오허(饒河) 현에 ‘광동학교’를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그런 그가 다시금 ‘빼앗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1919년 3·1운동이 계기가 됐다. 17세의 유관순 열사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소식에 환갑을 훌쩍 넘긴 강 의사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선생 등과 함께한 자리에서 그는 거사를 자원했다.
그해 9월 2일 서울역(당시는 남대문역) 앞. 강 의사는 가슴 속에 영국제 폭탄을 들고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이날 3대 조선총독에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타고 있던 마차에 멈췄다.
마차가 가까이 왔을 때 강 의사는 주저 없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사이토를 빗나갔고 일본 경찰과 수행원, 신문기자 등 30명이 부상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당시 일본 수뇌부를 깜짝 놀라게 했던 사건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 중구 서울역. 이 서울역사 앞에는 그의 흔적을 담은 기념비가 있다. ‘강우규 의사 항일의거 자리.’
강 의사는 폭탄을 투척한 직후 체포돼 이듬해 4월 20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정에서 그는 의연하게 말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늙은이가 구구하게 생명을 연장하자는 게 아니다. 재판장이여, 나는 이미 죽기로 맹세한 사람이니 아무쪼록 당신네(일본인)는 널리 동양 전체를 위해 평화를 그르치지 말기를 기원할 뿐이다.”
우리 정부는 1962년 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일제에 폭탄을 던지며 항거한 강 의사의 노익장은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한다. 공자도 “60세에는 듣는 대로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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