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8년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 즉위

  • 입력 2006년 9월 6일 02시 58분


1948년 9월 6일 율리아나(1909∼2004) 여왕이 네덜란드의 제5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율리아나 여왕은 몇 년간 힘든 시기를 겪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네덜란드가 독일에 침공당하자 여왕은 두 딸과 함께 캐나다 오타와로 피란했다. 국민을 두고 도망쳤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임신 중이었던 이국땅에서 셋째 아이를 낳아야 했다. 슈퍼마켓에 가서 직접 장을 보고 요리도 해야 했고 갓 낳은 아이를 포함해 세 딸을 돌봐야 했다.

그렇지만, 이 시간은 여왕의 장점을 처음으로 증명한 때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율리아나가 차기 국왕으로 적합하겠느냐며 미덥지 않아 했다. 전쟁 중 율리아나가 보여 준 모습은 그런 의구심을 사라지게 했다. 캐나다에 머물 때는 이웃 사람들조차 왕족인 줄 모를 정도로 수수하면서도 따뜻한 품성을 보였으며, 네덜란드의 일부 지역이 수복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귀국해 임시정부를 세울 정도로 과감함을 보였다. 여왕으로 즉위했을 즈음엔 국민의 지지도 압도적이었다.

여왕의 강인함과 소박함은 통치 기간 내내 빛을 발했다. 후진국의 빈곤과 아동복지 문제를 해소하는 데 앞장서는 여왕의 모습에 세계 각국이 찬사를 보냈다. 1953년 폭풍이 네덜란드를 강타해 전국이 쑥대밭이 됐을 때 흙탕물 속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면서 구호에 앞장서 국민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렇듯 한 나라의 여왕으로서 추앙받는 삶을 살았으나, 여성으로서의 율리아나의 일생은 순탄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남편과 자식들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바람기로 유명했던 데다 나치 당원이었다는 소문, 미국 록히드 마틴사에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 등이 잇달아 제기됐다. 임신 중에 앓았던 풍진 때문에 막내 크리스티나 공주는 시력을 거의 잃은 채 태어나 어머니에게 평생 마음의 상처로 남았다. 둘째 이레너 공주가 부모 몰래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는 독실한 개신교 국가였던 네덜란드의 국민이 아우성을 쳤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평생 상냥하고 정 많았던 율리아나 여왕을 네덜란드 국민은 아끼고 사랑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율리아나 여왕의 생일인 4월 30일을 ‘여왕의 날’로 지정해 국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축제를 즐긴다. 1980년 베아트릭스 여왕이 제6대 국왕에 올랐지만 국민은 4월 축제가 너무나 즐거운 나머지, 1월의 베아트릭스 여왕 탄생일은 간단하게 기념하고 4월의 ‘여왕의 날’을 오래도록 축하하기로 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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