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7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금아 피천득(96·사진) 선생의 자택. 동행한 이들은 일본어 번역가 이춘자 씨와 일본 ALC출판사 편집장 배정열 씨. ‘피천득 수필집’ 일본어판 출간을 앞두고서다. ‘피천득 수필집’에는 널리 알려진 ‘인연’과 ‘수필’ ‘서영이’ ‘만년’ 등 16편이 실렸다.
선생의 작품이 일본어로 번역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인연’의 주인공 아사코의 나라에서 ‘인연’이 나오는 것이다. 표지 그림을 보여 주자 선생은 “아, 종달새… 스위트피군요”라고 했다. 스위트피는 ‘인연’에서 ‘아사코 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으로 묘사된 그 꽃, ‘종달새’는 선생의 잘 알려진 수필 제목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서가 비슷한 데가 많아요. 봄에 비가 오면 우리나라에서 ‘봄비에 왜 우산을 쓰느냐’는 말을 하는데, 일본에도 비슷한 표현으로 ‘봄비니까 맞고 가자’는 게 있거든요. 이렇게 닮은 말도 있고, 청빈을 추구하는 사상도 닮았고…. 내 작품을 읽고 일본 사람들도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책은 다음 달 18일 일본 전역에 배포된다. 초판 5000부이고 한국어 교재로도 쓰기 위해 일한대역(對譯)으로 나온다. “아사코도 책 소식을 듣겠지요?”라고 물었더니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아사코는 미국에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금세 잔잔한 웃음을 띠면서 “그렇지만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 (아사코도) 살고 있을 테니, 책이 나오면 얘기가 전해지겠지요”라고 말했다.
‘인연’은 1974년 ‘수필문학’에 발표된 작품이다. 76년 ‘인연’을 제목으로 한 수필집이 범우사에서 나왔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이 수필집은 현재 샘터사로 옮겨 나오고 있다.
선생의 정감 있는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선생은 “몇 년 전 국내 방송사에서 아사코를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는데 딱 잘라 거절했잖아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선생은 올봄 아흔여섯 번째 생신을 맞았다. “가벼운 감기를 치렀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클래식 음악 듣고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난영이는 잘 있느냐고 묻자 선생은 가서 보라며 방을 가리켰다. ‘난영이’는 딸 서영 씨가 어렸을 때 갖고 논 인형이다. 서영 씨 동생이라며 선생이 ‘난영’이라고 이름 붙여줬다. 그 옆에 있는 곰 인형에게는 눈가리개가 있다. 난영이는 누우면 눈을 감는다. 곰인형에게는 밤마다 눈가리개를 해 준다.
산문은 많이 나오지만 좋은 수필을 찾기 어렵지 않으냐는 얘기에 선생은 소박하면서도 단호한 수필관을 밝혔다. “수필은 낭만적이고 서정적이고 소프트해야 해요. 수필은 서정 그 자체지요.”
더 얘기하고 싶어 하는 선생을 의사인 둘째 아들이 말렸다. 방문한 사람들이 인사를 하자 선생은 “벌써 가려고?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요”라며 아쉬워했다. 문 앞까지 나와 손님을 배웅하는 선생의 표정은 그의 수필처럼 따뜻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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