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씨는 28일 “반세기가 넘어서야 성묘를 하러 간다니 참으로 기가 막힌다”면서 “이제야 뒤늦은 성묘를 하게 됐다는 점에서 기쁨보다 선친에 대한 미안함이 앞선다”고 밝혔다.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간 김 씨는 “20년 넘게 살면서도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한 번도 잊지 않았다”며 “미국에서의 생활이 불편했지만 미국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한국 국적만 갖고 살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는 항일(抗日)은 정말 철두철미했다”며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물론 귀국 후에도 일본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일본 음식조차 먹지 않았다”고 선친을 회고했다.
고령에 난청을 겪고 있는 김 씨는 “아버지는 (정치인이면서도) 백성을 돌보지 않고 제 잇속만 챙기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 것으로 기억한다”며 “철저한 개혁을 통해 부정부패를 없애는 정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임정에서 외무총장과 학무총장을 지낸 김규식 선생은 김구 주석과 함께 좌우합작을 위한 남북협상을 주도했지만 실패했으며, 6·25전쟁 발발 직후 납북된 뒤 건강 악화로 별세해 북한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한편 김 씨의 방북에는 김상덕(문화부장), 김의한(외교위원), 안재홍(청년외교단 총무), 윤기섭(군사위원장), 장현식(자금조달), 조소앙(외교부장), 조완구(내무부장), 최동오(법무부장) 선생 등 임정에서 요직을 맡았던 독립운동가 8인의 후손들도 동행한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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