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들은 어떤 예감이나 전조 없이, 느닷없이 나를 찾아왔다. 늘 갈팡질팡 헤매다가 겨우 간신히 그 우연들에서 벗어나곤 했다.’
작가뿐일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나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얘기다. 오죽하면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묘비에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새기겠다고 했을까. 갈팡질팡하다가 소설가가 된 이기호(34) 씨. 그런데 첫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가 독특한 문체 실험이라는 호평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자전소설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인용하자면, “그 갈팡질팡들을 모두 글로 옮겼으니, 그래서 그 글들로 지금까지 밥벌이를 해 왔으니…다 지나고 난 뒤에 보니까 그럴 줄 알았다”란다.
이 책은 이 씨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엉뚱하고 개성적인 실험정신은 그대로이되, 세태를 꼬집는 비판정신은 더욱 날이 섰다. 설렁설렁 쓰인 듯싶은데, 입담 읽는 재미에 은근히 빠지게 되는 매력도 여전하다.
‘최순덕 성령충만기’에서도 등장했던,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던 우리의 시봉이는 이번엔 밤마다 국기를 수거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국기게양대 로망스’), 근근이 먹고사는 데 지쳐 부잣집 딸의 차에 뛰어들자고 마음먹기도 한다(‘당신이 잠든 밤에’). 다시 등장한 시봉이의 삶은 여전히 딱하고 안쓰럽다. 시봉이와 닮은 우리네 인간 군상의 모습도 그러할 것이다.
새 소설집에서는 특히 소설가 주인공이 자주 등장한다. ‘수인(囚人)’에서 소설가는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아수라장이 된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교보문고를 뒤덮은 시멘트 벽을 곡괭이로 뚫고 들어간다. ‘나쁜 소설-누군가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이야기’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최면을 걸어 여관방에서 콜걸에게 소설을 읽어주도록 시킨다. ‘소설가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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