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삼족(三族)'이 멸해진 사육신 박팽년의 이야기, 자신이 직접 잘못하지 않아도 덩달아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사회, 그리고 뜻하지 않게 큰 정치소용돌이에 휩쓸린 학생들에 대한 생각이 스쳐갔다.
그는 "대통령을 낳은 자궁이 위대하다면 8명 학생들을 낳은 자궁도 똑같이 위대하니 다른 사람의 생명이라고 소홀히 하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희곡을 내놓았고, 그 희곡은 30여 년 동안 우리 연극계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대표작 '태'(胎)가 되었다.
'태'는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죽이고 죽여야 하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핏줄에 대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작품. 박중림(박팽년의 아버지)의 손부(孫婦)는 자신이 갓 낳은 아들과 종이 나은 아들을 몰래 바꿔치기 함으로써 삼족을 멸하려는 세조로부터 가문의 대를 잇는데 성공하지만 대신 종의 갓난 아들은 죽음을 맞는다.
1974년 초연 이후 관객과 평단에서 모두 호평을 받으며 꾸준히 공연돼 온 '태'를 연출가 오태석이 국립극단과 함께 다시 무대에 올린다. 2000년 이후 6년 만의 공연이다. 국립극장이 한국을 대표할만한 공연을 선정해 3년에 걸쳐 작품 당 약 5억 원 정도를 지원하는 '국가브랜드 공연'이 된 것.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작품이 계속 제자리에 있는 것 같아 이번에 '수선'을 했다"는 오태석 연출의 말처럼 이번 공연에서는 '죽음'에 대한 부분을 많이 보강해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등 초연 때 없었던 '모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을 망령으로 등장시켰고 단종의 역할을 좀더 부각시키는 등 내용을 손질했다.
국립극단의 간판 원로배우 장민호, 백성희 씨가 각각 신숙주와 소헌왕후 역으로 출연한다.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세조 역은 김재건 씨가 맡았다.
'태'는 인도 국제연극제에 초청돼 내년 1월 뉴델리와 캘커타에서 공연된다. 한편 오태석 연출은 11월 23일부터 12월 9일까지 영국 런던의 세계적인 공연장인 바비컨 센터의 초청으로 우리식으로 바꾼 셰익스피어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을 바비컨 센터의 소극장 피트에서 공연한다. '태'는 11월 10일부터 1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화~금 오후 7시 반, 토 오후 4시, 7시 반, 일 오후 4시. 2만~3만원. 02-2280-4115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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