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모던 록 밴드로 활동한다는 것. 여기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9년간 밴드 자우림으로 활동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7년 결성된 이래 한국 모던 록의 근간을 지켜 온 이들의 사명은 만만찮았을 것이다. 이들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묵직하게 진행됐다. “아, 너무 어려워요”라는 괴성이 흘러나왔다.
“한국에서 밴드를 한다는 게 힘들진 않지만 갈수록 진지하게 음악을 하는 이들이 힘들어지는 분위기예요. 우리는 과도한 야심가는 아니지만 음악만은 진지하게 하고 싶거든요.”(김윤아·보컬)
“‘자우림’이란 이름이 새겨진 앨범 한 장을 내는 게 9년 전 목표였죠. 지금도 우리 마음에 드는 앨범 한 장을 만드는 것이 ‘자우림’의 본질이니까요. 다만 30대가 되다 보니 음악만큼 삶에도 집착하게 되더군요.”(구태훈·드럼)
삶에 대한 진지함. 그것은 앨범 재킷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다. 2년 만에 발표한 6집 ‘애시스 투 애시스’. 재킷은 온통 시커멓고 김윤아는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 팔꿈치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다. ‘자우림’이 아닌 ‘흑우림’으로 변신한 이들에게 그 낯선 어둠은 두렵기까지 하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라’는 영어 추도문에서 앨범 제목을 지었어요. 처음부터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우리가 아등바등 사는 모습들이 부질없어 보였어요. 어차피 한 줌의 ‘재’로 돌아갈 가벼운 존재인데….”(김윤아)
“어릴 적 선생님은 ‘경쟁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르쳐 주셨죠. 하지만 요즘은 ‘경쟁력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시더군요. 과연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김진만·베이스)
인생에 대한 멤버들의 우울함은 앨범 첫 곡 ‘서울 블루스’부터 시작된다. 이번 앨범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메시지를 던지듯 김윤아는 이 노래에서 “아, 모든 것이 사라지네”라고 읊는다. 경쾌하지만 구슬픈 사랑 노래인 타이틀 곡 ‘유 앤드 미’ 역시 “어디까지가 사랑인 건지/언제부터 난 혼자였는지”라며 울부짖는다. 6월 결혼한 새 신부 김윤아에게서 팬들은 ‘러브송’ 한 곡을 기대했으나 그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과 다릅니다. 전 어두운 인생을 노래하며 제 인생을 정화한다고 생각해요. 제 안의 어두운 찌꺼기들을 뱉어 내다 보니 오히려 삶이 더 아름다워졌어요. 그건 창작자들의 특권이기도 하죠.”(김윤아)
“최근 음악이 너무 표피적인 것 같다” “상품 논리가 창작 논리를 앞서면 경박해진다” “이렇게 가다간 한국문화 자체가 사라질 위기다” 등 이들의 대화는 갈수록 무겁고 진지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 음악 너무 좋다”며 ‘자뻑(자기에게 도취된 상태) 모드’로 들어가는 멤버들. 이제 이들의 얼굴에도 주름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지만 ‘규격화된 음악’을 거부하는 것은 9년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듯하다.
“9년 동안 ‘자우림’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어요. 아직도 새벽만 되면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불안이 엄습해 오고 앨범 작업을 할 때는 몸에 두드러기가 나지만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제 내년이면 10주년인데 입버릇처럼 ‘안식년이니 쉬자’고 하지만 ‘자우림’으로 활동하는 한 절대 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자우림’은 청춘 그 자체이니까요.”(김진만)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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