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신경림 시인(71)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묻어났다.
얼마 전 발간된 '나의 고전읽기(북섬)'에서 시인 정지용에 대해 평가하던 그는 친일 시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차별적인 단죄 풍토에 거부감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친일을 한 것이 잘 했다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를 한 뒤 "그 때 활동한 예술인 중 친일에 연루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언제까지나 그의 시를 친일의 굴레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과 민예총 사무총장 및 공동 상임위원장을 지내는 등 한국 문학계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 그이지만 발언에 망설임이 없었다.
"친일을 했다고 미당의 작품을 폄하한다면 과거에 정지용을 월북시인이라고 매도했던 것과 다를 게 뭐냐"며 문학 작품과 과거 행적의 분리 평가를 거듭 강조했다.
역시 일부 시민단체에서 친일 시인으로 분류하는 청마 유치환에 대해서도 그는 "청마의 시를 두고 친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선을 그은 뒤 "요즘은 친일이다 뭐다 해서 선배 문인들의 흠집을 찾는데만 혈안이 된 것 같다"고 문단풍토를 꼬집었다.
그는 이어 "서정주 못지않은 친일을 한 이찬은 월북한 뒤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지어 친일 추궁을 받지 않았고, 박승 또한 친일 행위가 많았지만 북에서 '애국가'를 지어 나중에 '인민 영웅'의 칭호까지 받았다"며 일부에서 주장하는 북한의 '친일청산론'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서정주의 시를 제대로 평가해주자"고 주장하는 신씨지만 정작 서정주의 작품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없다. 그의 작품도 잘 읽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가장 과대 평가된 시인 중 한 명에 서정주가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훌륭한 시인이지만 '경쟁자'들 중 일부가 월북하는 바람에 과대 포장된 부분도 있다"고 동의했다.
시인 정지용의 작품을 우리 시의 고전으로 꼽는다는 그는 "정지용은 월북했지만 김일성·김정일 부자에 대한 찬양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고 그래서 북한의 문학계에서 어떤 평가도 받지 못하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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