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수십억 호가 씨수말들 귀족생활…황제도 안부럽다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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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젖을 한번도 빨아보지 못한 제주산 말 ‘천둥이’와 엄마 없이 자란 기수 시은(임수정)이 경마 레이스에서 기적적으로 우승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각설탕’의 내용이다. 관객들은 뭉클한 감동에 젖었지만 실제 경마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미국 할리우드의 경주마 영화인 ‘씨비스킷’과 ‘드리머’가 그랬듯 말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혈통을 타고나야 고난을 겪더라도 결국 우승할 수 있다. 경마가 ‘혈통 스포츠(Blood Sports)’로 불리는 이유다. 씨수말 몸값에서 종전 1위 ‘볼포니(37억 원)’를 제치고 국내 최고 기록(40억 원)을 세운 명마 ‘메니피’가 20일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 땅을 밟았다. 올해 10세인 ‘메니피’는 한 번 교배료로 1만5000달러를 받는 데뷔 7년째의 베테랑 씨수말. 씨수말이란 교배를 통해 뛰어난 혈통의 경주마를 생산하는 종마를 가리킨다. 몸값이 20억 원에 이르는 ‘비카’도 27일 입국한다. ‘메니피’와 ‘비카’의 도입으로 한국마사회(KRA)는 몸값이 20억 원을 넘는 씨수말 여섯 마리(총 166억 원 상당)를 보유하게 됐다. 명마 생산 경쟁이 본격화된 셈이다. ‘황제말’로 불리는 씨수말들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 반입때도 황제급 예우

“조심해. 말 한 마리가 40억 원이 넘는대. 잘못되면 우리가 책임져야 할지도 몰라.”

20일 인천 영종도의 국제수의과학검역원 직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국내 최고가의 동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반 동물을 반입할 때와는 달리 메니피의 도착 사실을 KRA에 미리 통보하는 ‘예우’를 갖췄다.

‘황제마’로 불리는 씨수말은 도착과 동시에 특급관리가 이뤄진다. 판매자 측은 관리사를 동행시켜 말의 상태와 습성을 설명한 뒤 인계한다. 인수한 KRA 직원들은 40여 일간의 검역기간 내내 교대로 말 옆에서 대기하면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이번에 도입된 메니피와 비카도 이런 과정을 거쳐 12월초 제주도로 수송된다. 내년 3월부터는 씨수말로서의 본격적인 역할을 시작한다.

KRA가 2004년부터 도입한 엑스플로잇(28억 원) 커맨더블(21억 원) 볼포니(37억 원) 양키빅터(20억 원) 등 값비싼 씨수말들은 황제 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일반 경주마의 마방이 3∼4평 미만의 시멘트 외장재로 돼 있는 반면 씨수말들은 일반 마방 2배 크기에 최고급 원목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생활한다. 마방의 입구엔 혈통표와 경주마 활동 때의 전적 등을 상세히 기록한 금장 명패가 붙어 있다. 2000평이 넘는 전용초지도 제공된다. 2마리 이상이 같이 지내면 영역 싸움을 벌이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20억 원 이상의 씨수말에게 마늘가루와 홍삼을 영양보충제로 주고 있다. 교배가 본격화되는 내년 3∼6월 사이에는 누에그라(국내산 정력강화제)도 제공할 계획이다.

제주경주마목장 생산관리팀의 이은도 과장은 “수의사를 포함해 50여 명의 인력이 21마리의 씨수말을 밤낮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씨수말들이 평생 똑같은 대접을 보장받는 것은 아니다. 씨수말이 생산한 자마(子馬)의 레이스 결과에 따라 씨수말의 노년 대우와 은퇴 시기가 달라진다. KRA 소속 ‘디디미’의 경우 자마들이 매년 레이스 경쟁에서 10위권 안에 들고 있어 은퇴 나이를 훌쩍 넘은 25세인 지금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KRA 홍보실 김성철 대리는 “20억 원을 호가하는 씨수말의 자마들이 최소 1.5∼1.6초의 시간을 단축하며 2008년경부터 본격적인 활약을 펼칠 것”이라며 “이들 말 중 누가 진정 ‘효자’가 될지를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 황제와의 연애 “줄을 서시오.”

명문 씨수말과 교배할 씨암말의 선택은 황후를 간택하는 절차 못지않게 까다롭다.

A, B, C 세 등급으로 나눠진 씨암말은 자기 수준에 맞는 씨수말과 교배할 기본 자격을 얻는다. 이후 ‘경주마궁합 데이터’인 닉스(Nick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최고의 경주마가 생산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나와야 황후 씨암말로 최종 간택된다.

씨수말 역시 몸값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씨수말은 3∼6월의 교배 시즌 동안 힘이 빠져 기진맥진해도 암말이 보는 앞에서는 맥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당당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굴복시킬 수 없다는 야생의 본능 때문이다.

씨수말은 암말을 제압하기 위해 괴성을 지르며 앞발을 들고 기립자세를 취하지만 교배 시간은 5∼15초에 불과하다. 맹수가 나타날 경우 도망가기 위해 터득한 생존 습관이라고 한다.

황제와 황후의 결합 뒤에는 불운의 주인공 시정마(試精馬·teaser)가 있다.

시정마는 덩치가 작고 잘 숙련된 조랑말로 다양한 기교를 구사해 씨암말의 발정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씨암말이 준비가 되면 주인공인 씨수말에게 자리를 내주는 처지가 된다. 그러다보니 과도한 스트레스로 수명이 짧아지거나 신경이 곤두선 씨암말의 뒷발에 사정없이 걷어차이기도 한다.

일부 외국의 마주들은 고가의 교배료를 받기 위해 계절 번식의 자연섭리를 어기고 일년 내내 교배를 유도한다. ‘셔틀스탤리온(Shuttle Stallion)’이라고 불리는 이들 씨수말은 상반기는 북반구, 하반기는 남반구를 오가며 일반 씨수말의 배가 넘는 200마리 이상의 씨암말과 사랑을 나눈다.

경마 전문가들은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경주마 ‘스마티존스’가 은퇴하자 마주가 셔틀스탤리온으로 쓰지 않기로 결정해 경마 팬들을 감동시켰다”며 “호사스러운 대접에 엄격한 관리를 받아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면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최고 몸값 450억 원 美 스톰캣… ‘황금을 낳는 씨수말’▼

‘한 번 교배에 50만 달러!’

세계에서 가장 비싼 말은 미국의 씨수말 ‘스톰캣(Storm Cat)’으로 5000만 달러(약 450억 원)에 이른다. 한 번 교배 비용이 50만 달러로 1년에 최대 100회를 교배할 경우 5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릴 수 있어 ‘황금을 낳는 씨수말’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거래되는 고가의 말은 평지경주(Flat race)에 사용되는 서러브렛 종(種). 서러브렛 경주마는 주로 1∼2세 때 경매시장을 통해 거래된다.

서러브렛 경주마의 역대 최고가격은 올 2월 미국 플로리다 경매장에서 거래된 ‘몽키그린(Green Monkey)’으로 낙찰가가 무려 1600만 달러(약 150억 원)였다. 1600만 달러는 서러브렛 경주마 시장에서도 특이한 사례지만 100만 달러 이상의 가격에 거래되는 사례는 종종 있다.

1∼2세의 경주마들이 비싼 값에 낙찰되는 것은 뛰어난 혈통과 체격을 갖췄고 연습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또 우수한 말을 둘러싼 마주나 목장들의 과도한 경쟁으로 가격이 높아지기도 한다.

일본의 유명한 씨수말 ‘선데이 사일런스(Sunday Silence)’의 경우 유럽의 구매희망자가 1억 달러(약 950억 원)를 제안했으나 일본인 마주가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경주마로 활용되는 서러브렛 경주마의 평균가격은 2만∼3만 달러(약 2500만 원). 하지만 KRA가 최근 20억 원 이상의 씨수말 6마리를 도입하면서 본격적인 고가 경주마 시대가 열릴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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